자비심, 사랑 본연의 맛-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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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애착하는 동물이다. 집착은 대상을 필요로 하며, 이는 집착하는 주체와 집착당하는 대상이 나누어져 있음을 전제로 한다. 왜 집착하는가? 내가 아니라 나의 대상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내가 소유할 수 없다. 이런 근원적인 한계는 주체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고, 불안하니까 더욱더 집착하게 한다.
불교는 애착과 사랑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애착은 갈애라고 하며 갈애가 온갓 번뇌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애착과 구별되는 사랑은 자비심으로 표현한다. 동체대비라는 말이 있다. 마치 한 몸인 듯 큰 사랑을 낸다는 뜻이다. 자비심에서 ‘자’는 함께 기뻐하고, ‘비’는 함께 슬퍼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증득한 경지에 이르면 나와 너라는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나 만 존재할 뿐, 나 아닌 것들은 애당초 있지도 않다. 그래서 유아독존인 것이다. 소금 본연의 맛이 짠 맛이라면, 사랑 본연의 맛은 자비심이다.
내가 소중한 만큼 너도 소중하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너도 싫어할 것이니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런 생각은 자비심이 아니다. 분별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애착이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자비심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산물이다. ‘나’라는 잣대를 가지고 ‘너’를 가늠하는 것은 곧 나와 너가 완전히 무관한 존재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또다른 너이고, 너는 또다른 나이다. 나가 곧 너이고 너가 곧 나이다. 나와 너는 다르지 않다. 나와 너는 같다. 더이상 나, 너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런 경지에서 나오는 마음이 자비심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나와 너 중 어느 한쪽을 없애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지금의 나를 확장하거나, 아니면 나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식으로 나와 너를 하나로 합체하려 한다. 나를 확장하는 것은 남을 지배하는 것이요, 나를 죽이는 것은 너의 노예를 자처하는 것이다.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생각, 즉 역지사지는 자리이타로 발전한다. 나에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자비심이다. 어느 한 쪽만 이로운 것은 자비심에 근거한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비심은 아예 나와 너라는 구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는 자비심의 출발이다. 역지사지에서 출발하여 자리이타로 발전하고 동체대비에 이르러 자비심은 완성된다. 동체대비의 자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이다.
“내가 너의 어둠을 밝혀줄 수 있다면/ 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네/ 너 가는 길마다 함께 다니며/ 너의 길을 비추겠네/ 내가 너의 아픔을 만져줄 수 있다면/ 이름없는 들의 꽃이 되어도 좋겠네/ 음- 눈물이 고인 너의 눈 속에/ 슬픈 춤으로 흔들리겠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가난한 삶과 영혼을 모두 주고 싶네”(‘내사람이여’ 중에서, 김광석, 1995)
비록 미미할지라도 자비심은 인간의 본능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있다. 사랑이 깊어지면 자비심도 고개를 든다. 정말 사랑한다면 헌신하고 싶다. 내 자신을 모두 바쳐 그 사람을 위해 살고 싶다. 그 사람만 행복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그 사람이 괴로워하면 나도 괴롭다. 그 사람과 내가 마치 한 몸인 듯하다. 이런 마음은 애착으로 폄하될 수 없다. 그 사람이라는 특정한 개인에게 갇혀 있다는 점에서 온전한 자비심은 아니지만, 애착의 단계를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내사람이여’는 김광석이 지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딸을 위해 만든 노래다. 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은 마음이 절절하게 베어나온다. 만약 사랑이 아름다운 구속이라면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것이 자비심이요, 아마도 구속을 담당하는 것은 애착일 것이다. 사랑이 깊을 수록 둘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부모라고 해서 모두 자식에게 헌신하는 것도 아니고, 연인 사이라고 해서 성적 쾌락에만 빠져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사랑은 매우 복합적이고 모호한 감정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정의 내리기 힘들다. 그러니 살면서 한번쯤은 찐한 사랑을 해봐야 한다. 사랑은 결국 애착이니 “사랑 같은 것 난 몰라. 그런 거 안해!” 라고 말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제대로 된 깊은 맛의 장을 맛보려면 어느 정도의 구더기는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이 컬러풀하고 풍요로워진다.
내가 소중한 만큼 너도 소중하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너도 싫어할 것이니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런 생각은 자비심이 아니다. 분별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애착이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자비심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산물이다. ‘나’라는 잣대를 가지고 ‘너’를 가늠하는 것은 곧 나와 너가 완전히 무관한 존재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생각, 즉 역지사지는 자리이타로 발전한다. 나에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자비심이다. 어느 한 쪽만 이로운 것은 자비심에 근거한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비심은 아예 나와 너라는 구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는 자비심의 출발이다. 역지사지에서 출발하여 자리이타로 발전하고 동체대비에 이르러 자비심은 완성된다. 동체대비의 자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이다.
“내가 너의 어둠을 밝혀줄 수 있다면/ 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네/ 너 가는 길마다 함께 다니며/ 너의 길을 비추겠네/ 내가 너의 아픔을 만져줄 수 있다면/ 이름없는 들의 꽃이 되어도 좋겠네/ 음- 눈물이 고인 너의 눈 속에/ 슬픈 춤으로 흔들리겠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가난한 삶과 영혼을 모두 주고 싶네”(‘내사람이여’ 중에서, 김광석, 1995)
비록 미미할지라도 자비심은 인간의 본능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있다. 사랑이 깊어지면 자비심도 고개를 든다. 정말 사랑한다면 헌신하고 싶다. 내 자신을 모두 바쳐 그 사람을 위해 살고 싶다. 그 사람만 행복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그 사람이 괴로워하면 나도 괴롭다. 그 사람과 내가 마치 한 몸인 듯하다. 이런 마음은 애착으로 폄하될 수 없다. 그 사람이라는 특정한 개인에게 갇혀 있다는 점에서 온전한 자비심은 아니지만, 애착의 단계를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내사람이여’는 김광석이 지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딸을 위해 만든 노래다. 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은 마음이 절절하게 베어나온다. 만약 사랑이 아름다운 구속이라면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것이 자비심이요, 아마도 구속을 담당하는 것은 애착일 것이다. 사랑이 깊을 수록 둘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부모라고 해서 모두 자식에게 헌신하는 것도 아니고, 연인 사이라고 해서 성적 쾌락에만 빠져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사랑은 매우 복합적이고 모호한 감정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정의 내리기 힘들다. 그러니 살면서 한번쯤은 찐한 사랑을 해봐야 한다. 사랑은 결국 애착이니 “사랑 같은 것 난 몰라. 그런 거 안해!” 라고 말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제대로 된 깊은 맛의 장을 맛보려면 어느 정도의 구더기는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이 컬러풀하고 풍요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