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함평에서 만난 길마가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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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함평에서 만난 길마가지나무[
2025년 04월 16일(수) 21:30
식물세밀화는 식물의 형태를 그림으로 기록한 기록물이다. 나는 식물의 시각 이미지를 기록하는 일을 하지만 실제 만나는 식물을 눈으로만 감각하진 않는다. 수피의 촉감을 느끼거나 꽃향기를 맡거나 열매의 맛을 느낄 때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식물 이름만 떠올려도 그 식물의 촉감이 생생히 떠오르고, 어느 계절만 떠올려도 그 계절에 본 식물의 향기가 느껴질 때도 있다.

‘초봄’이란 계절을 떠올릴 때마다 내 코 끝에 전해지는 향기가 있다. 길마가지나무의 꽃향기. 작년 함평에서 맡은 그 향기를 나는 잊을 수 없다.

함평은 내게 추억이 깃든 고장이다. 함평에서 농사를 짓는 나의 오랜 독자 덕분에 함평에 두어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동료들이 운영하는 농장으로 오가던 길 고즈넉한 산골 풍경과 나를 초대한 사람들의 정다움이 일더미에 지친 내게 오랫동안 위안이 되었다. 나는 종종 함평에 들렀고 작년에도 강의가 있어 목포에 온 김에 시간을 내 함평자연생태공원에 갔다.

3월 초 아직 추위가 다 가지 않은 시기, 꽃을 볼 기대 없이 공원을 걷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가 났다. 향기에 이끌려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 가지에 흰 꽃이 가득 매달려 있는 나무가 있었다. 길마가지나무였다.

길마가지나무는 내게 매우 익숙한 식물이다. 이들은 내가 자주 가는 광릉숲에도 많다. 다만 광릉숲에서는 3월 말 즈음이 되어야 꽃이 피기 시작하지만 함평에선 그보다 한 달여 빨리 꽃을 볼 수 있다.

초봄의 길마가지나무에서는 상큼한 향이 난다. 정확히는 이들 꽃에서 나는 향이다. 여러 문헌에서는 이 향을 레몬향이라고 설명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레몬향과는 큰 차이가 있다. 상큼한 향이 조금 서린 플로라 향이랄까. 게다가 함평생태공원의 길마가지나무의 꽃에게서는 2~3미터 밖에서도 맡을 수 있을 만큼 짙은 향이 났다.

길마가지나무에게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유독 많다. 나무에 잔가지가 많아 사람의 발길을 막아서 이름 붙었다거나, 이들의 짙은 꽃향기가 지나는 사람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라거나, 황해도 방언이라고도 한다. 가장 유력한 설로는 이 나무의 씨방과 꽃의 모양, 나무의 줄기가 굽어 자라는 모습이 물건을 옮기기 위해 소와 말 등에 올리던 안장인 ‘길마’를 닮아 길마가지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길마가지나무와 비슷한 시기 개화하고 꽃의 형태가 비슷한 나무도 있다. 괴불나무 중 유독 일찍 꽃을 피우는 올괴불나무. 이들도 가지에 잎이 돋기 전 꽃부터 피워 길마가지나무와 헷갈리기 쉬우나 올괴불나무에게서는 길마가지나무만큼 짙은 향기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길마가지나무 꽃의 꽃밥이 노란색인 반면 올괴불나무의 꽃밥은 분홍색이다.

함평에 다녀온 지 3주가 지났을 때 광릉의 길마가지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이들 꽃색은 연분홍, 연노랑이 섞인 흰색이며 5개의 수술이 있고, 1개의 암술대에는 털이 없다. 그리고 함평에서 맡았던 향기가 났다. 그러나 그 향만큼 짙진 않았다.

사실 길마가지나무가 숲에서 가장 빛나는 계절은 따로 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는 계절이다. 열매는 5∼6월에 성숙하는데 장과로서 2개의 열매 아래 절반이 합생하여 하트 형태가 된다. 가지마다 열매가 익는 속도가 달라서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하트 모양 열매가 거꾸로 달려 있는 모습이 참 이색적이다. 마치 젤리 같은 열매를 손으로 누르면 톡 터지며 안에 있는 투명한 액체와 씨앗이 방출된다. 함평생태공원의 길마가지나무에 핀 꽃을 보며 다가오는 계절 빨간 하트 열매가 가득 맺을 모습을 상상했다.

어제 마침 함평에서 연락이 왔다. 그곳의 길마가지나무는 꽃이 이미 다 져서 보이지 않고 푸릇한 잎이 다 자랐다고 했다. 답신으로 나는 광릉의 길마가지나무 꽃이 만개한 사진을 보냈다.

가끔 다른 지역의 친구들과 식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영화 ‘동감’이 떠오를 때가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식물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지금 내 눈 앞의 길마가지나무는 그가 과거에 본 것이고 지금 그의 눈 앞 길마가지나무는 내가 미래에 마주할 것이란 점에서 말이다.

<식물 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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