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누정-불환정, 아름다운 강산은 삼공의 벼슬과도 바꿀 수 없다
호남 누정-광주<17> 불환정
조선 후기 임덕원이 광산구 내동마을에 건립
곧은 정신 지켜내려 심산유곡에 초막 짓고 살아
처음 띠집이었을 당시 ‘복룡암’으로 불려
후대 몇 차례 보수 1903년 기와지붕으로 개량
임씨들 선조 금호 임형수 ‘목각책판’ 보관
조선 후기 임덕원이 광산구 내동마을에 건립
곧은 정신 지켜내려 심산유곡에 초막 짓고 살아
처음 띠집이었을 당시 ‘복룡암’으로 불려
후대 몇 차례 보수 1903년 기와지붕으로 개량
임씨들 선조 금호 임형수 ‘목각책판’ 보관
![]() 광산구 등임동 내동마을 산중턱에 있는 불환정은 조선 후기 때 처사 임덕원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
세 칸 정사를 이곳에 세워놓고
의연히 속된 거처는 멀리했노라
성근 울타리엔 버드나무와 국화 심고
책상엔 깨끗한 거문고와 책이 있을 뿐
입은 다물고 남새밭 김을 매고
눈썹은 모으며 약초를 캐었네
한가로이 노니니 속세 생각 사라지고
텅 빈 욕심은 그저 알게 되노라
(임덕원의 ‘원운(原韻)’)
그 누정을 찾아가면서 ‘그 풍경에 그 주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태어나고 자란 산수를 닮기 마련이다. 도자기는 태토(胎土)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다. 신토불이(身土不二)와 같은 이치다. 자연의 엄정한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무람없는 이들의 과욕은 정한 이치를 넘곤 한다. 오늘날 도처에서 벌어지는 후안무치는 그런 부끄러움과 염치를 팽개친 결과들일 터다.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다. 입동을 지나면서 겨울이 서서히 본성을 드러낸다. 문 언저리까지 와서 찬 기운이 서성이는 걸 보니 조만간 추위가 몰아치려나 보다. 이 산야에 눈 내린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겠다,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설경만큼이나 새하얗고 시퍼렇게 살아 있을 옛 선비의 청청한 정신을 생각하자니 숙연해진다.
불환정(不換亭)은 조선 후기 때의 처사 임덕원(1713~1787)이 지었다. 소재지는 광산구 등임동 내동마을 어등산 북쪽 기슭. 사실 이 산중에 누정을 지은 처사 임덕원의 심중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다만 시대는 다를지언정, 세상사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그의 심사를 어렴풋이 가늠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대낮인데도 오솔길과 이어진 산길은 다소 어둑하다. 산자락 아래 몇 칸의 집들이 자리하지만, 외지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은일을 택해야만 했을 처사의 마음이 느껍게 다가온다. 그동안 다녔던 누정들이 마을이나 들판, 산의 초입에 자리한 것에 비하면 불환정은 격절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발걸음마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밟힌다. 저들의 부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노래가 아닌 ‘경고’로 다가온다. 저잣거리 속된 일에 묻혀 지내는 이의 방문인 것을 어쩌리. 세상의 아귀다툼은 끝이 없고 모사와 모략은 날로 승하여지는데, 고결한 처사가 머물렀던 산중에는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만 들릴 뿐이다.
불환정이라는 누정 이름은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이라는 고시(古詩)에서 유래한다. 송나라 시인이 삼공(조선시대에는 삼정승과 같음)이 높은 관직을 주어도 강산과 바꾸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선비의 기개와 고고함을 상징하는 말로 곧잘 쓰인다.
상량문에 ‘승정기원후삼신묘(崇禎紀元後三辛卯)’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정자는 1771년(영조 47)에 지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는 임덕원이 두어 칸의 띠집을 지어 거처했지만 후대에 몇 차례의 보수 작업을 펼쳤다. 1903년 지붕을 기와로 개량한 이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임덕원이 처음 띠집을 지었을 당시에는 복룡암(伏龍菴)으로도 불렸다 한다. 사람들이 띠집이 용이 엎드려 있는 형상을 닮았다는 데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
다음은 기우만(奇宇萬)이 쓴 ‘불환정중수기’(不換亭重修記) 일부다.
“‘삼공의 벼슬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강산의 승경(勝景)을 극찬한 말이다. 주인의 현명함이 엿보이는 말이다. 보편적으로 좋은 강산은 항상 있어도 좋은 주인은 항상 있지는 않는 법이다. 강산의 경치로만 따진다면 어등산(魚登山) 아래와 금강(錦江)의 물가가 승경으로 꼽힐 것이다. 여기에서 나고 자라 늙어 죽음에 이른 자들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세상을 초탈하여 사사로이 벼슬을 마음에 두지 않고 은일하며 죽기까지 이 산수의 좋은 주인을 꼽으라면 임선생을 추대할 수 있다.”
정자와 관련해 임씨들의 선조인 금호(錦湖) 임형수의 목각책판이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도난 등이 우려돼 현재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다. 목판은 서하(西河) 이민서가 광주목사로 재직할 당시 ‘금호문집’을 펴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온다.
산문 하나 없는 이 산중에 정자는 홀로 쓸쓸하다. 아니 아름답다. 주인장의 품성, 아니 가풍을 닮아서인지 담담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주변의 풍경은 가히 명승에 비견할 만 하다. 뒤로 수림은 울창하고, 군데군데 녹죽이 우거져 맑은 청정한 기운이 완연하다. 정자 한쪽에는 석간수를 끌어온 가느다란 통로가 설치돼 있다.
정내 앞 마당에는 돌을 어깃어깃 쌓아 올린 연방죽이 있다. 주위로 다종다양한 풀과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 있다. 방죽 안에는 작은 섬이 들어앉아 있는데 주인장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벼슬 따위에 애면글면하지 않고 ‘진흙’에 몸담지 않았던 선비가 그리워지는 시대다. 곧은 정신을 지켜내려 심산유곡에 초막을 지었던 이가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끝없이 권력을 탐하는 오늘의 세태에서 처사의 정신이 그렇게 빛난다.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은 “불환정은 일반의 누정들이 마을이나 들녘에 자리하는 것과 달리 깊은 산속에 있다”며 “당쟁의 정치 현장을 떠나 은거를 택했던 처사 임덕원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라고 말했다.
‘대체로 좋은 강산은 항상 있을지언정 좋은 주인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잠시 생각하며 산을 내려온다. 강산에 비견되는 그런 주인도 있다는 사실이 위안으로 다가온다. 비록 역사 속에서지만 말이다. 임덕원의 ‘절구’라는 시를 가만히 읊조리며 다시 ‘말 많고 탈 많은’ 세상으로 내려온다.
“남쪽 밭이랑을 애써 일구고/ 쓸쓸히 북창 앞에 잠을 자네/ 흐뭇한 마음이 어찌 도연명뿐이겠는가/ 혹여나 꿈속에서라도 만날 수 있을지” (‘절구’(絶句) 전문)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의연히 속된 거처는 멀리했노라
성근 울타리엔 버드나무와 국화 심고
책상엔 깨끗한 거문고와 책이 있을 뿐
입은 다물고 남새밭 김을 매고
눈썹은 모으며 약초를 캐었네
한가로이 노니니 속세 생각 사라지고
텅 빈 욕심은 그저 알게 되노라
![]() |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다. 입동을 지나면서 겨울이 서서히 본성을 드러낸다. 문 언저리까지 와서 찬 기운이 서성이는 걸 보니 조만간 추위가 몰아치려나 보다. 이 산야에 눈 내린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겠다,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설경만큼이나 새하얗고 시퍼렇게 살아 있을 옛 선비의 청청한 정신을 생각하자니 숙연해진다.
대낮인데도 오솔길과 이어진 산길은 다소 어둑하다. 산자락 아래 몇 칸의 집들이 자리하지만, 외지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은일을 택해야만 했을 처사의 마음이 느껍게 다가온다. 그동안 다녔던 누정들이 마을이나 들판, 산의 초입에 자리한 것에 비하면 불환정은 격절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 사방이 확 트인 정자. |
불환정이라는 누정 이름은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이라는 고시(古詩)에서 유래한다. 송나라 시인이 삼공(조선시대에는 삼정승과 같음)이 높은 관직을 주어도 강산과 바꾸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선비의 기개와 고고함을 상징하는 말로 곧잘 쓰인다.
상량문에 ‘승정기원후삼신묘(崇禎紀元後三辛卯)’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정자는 1771년(영조 47)에 지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는 임덕원이 두어 칸의 띠집을 지어 거처했지만 후대에 몇 차례의 보수 작업을 펼쳤다. 1903년 지붕을 기와로 개량한 이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임덕원이 처음 띠집을 지었을 당시에는 복룡암(伏龍菴)으로도 불렸다 한다. 사람들이 띠집이 용이 엎드려 있는 형상을 닮았다는 데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
다음은 기우만(奇宇萬)이 쓴 ‘불환정중수기’(不換亭重修記) 일부다.
“‘삼공의 벼슬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강산의 승경(勝景)을 극찬한 말이다. 주인의 현명함이 엿보이는 말이다. 보편적으로 좋은 강산은 항상 있어도 좋은 주인은 항상 있지는 않는 법이다. 강산의 경치로만 따진다면 어등산(魚登山) 아래와 금강(錦江)의 물가가 승경으로 꼽힐 것이다. 여기에서 나고 자라 늙어 죽음에 이른 자들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세상을 초탈하여 사사로이 벼슬을 마음에 두지 않고 은일하며 죽기까지 이 산수의 좋은 주인을 꼽으라면 임선생을 추대할 수 있다.”
정자와 관련해 임씨들의 선조인 금호(錦湖) 임형수의 목각책판이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도난 등이 우려돼 현재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다. 목판은 서하(西河) 이민서가 광주목사로 재직할 당시 ‘금호문집’을 펴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온다.
산문 하나 없는 이 산중에 정자는 홀로 쓸쓸하다. 아니 아름답다. 주인장의 품성, 아니 가풍을 닮아서인지 담담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주변의 풍경은 가히 명승에 비견할 만 하다. 뒤로 수림은 울창하고, 군데군데 녹죽이 우거져 맑은 청정한 기운이 완연하다. 정자 한쪽에는 석간수를 끌어온 가느다란 통로가 설치돼 있다.
정내 앞 마당에는 돌을 어깃어깃 쌓아 올린 연방죽이 있다. 주위로 다종다양한 풀과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 있다. 방죽 안에는 작은 섬이 들어앉아 있는데 주인장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 누정 앞 마당에 있는 작은 연못과 구름다리. |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은 “불환정은 일반의 누정들이 마을이나 들녘에 자리하는 것과 달리 깊은 산속에 있다”며 “당쟁의 정치 현장을 떠나 은거를 택했던 처사 임덕원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라고 말했다.
‘대체로 좋은 강산은 항상 있을지언정 좋은 주인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잠시 생각하며 산을 내려온다. 강산에 비견되는 그런 주인도 있다는 사실이 위안으로 다가온다. 비록 역사 속에서지만 말이다. 임덕원의 ‘절구’라는 시를 가만히 읊조리며 다시 ‘말 많고 탈 많은’ 세상으로 내려온다.
“남쪽 밭이랑을 애써 일구고/ 쓸쓸히 북창 앞에 잠을 자네/ 흐뭇한 마음이 어찌 도연명뿐이겠는가/ 혹여나 꿈속에서라도 만날 수 있을지” (‘절구’(絶句) 전문)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