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누정-야은당, 절의를 꺾는 대신 초야에 묻혀 선비의 도를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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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누정-야은당, 절의를 꺾는 대신 초야에 묻혀 선비의 도를 지키다
호남 누정-광주 <16> 야은당
조선말 학자 야은 김용훈, 과거시험 합격했지만
“궁하게 거처할지언정 절기를 잃을 수 없다” 결의
관직 포기하고 어머니 봉양하며 ‘은일’의 삶 살아
스승 뜻 받들고자 1936년 제자들이 세하동에 건립
‘한옥문화관’과 함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 운영
2023년 11월 05일(일) 19:30
광주시 서구 세하동에 있는 야은당(野隱堂)은 조선 말 선비 야은(野隱) 김용훈의 학덕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야인’(野人)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관직 등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다. 오늘날에는 현실 정치에서 떠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하다. 또한 특정 분야에서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다 일반인으로 돌아온 경우도 “야인이 됐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누구든 야인이 아니겠는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도 십일이면 지고,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도 족히 수 년이면 내려놓아야 한다. 야인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 어떤 분야에서든 천상천하유아독존을 구가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도도한 장강의 물도 뒤따르는 물살에 밀려나는 게 이치다. 그뿐이랴. 달도 차면 기울고 그릇도 차면 넘친다. 천지의 차고 비는 것 모두 자연의 엄정한 순환의 지배를 받는다.

세하동 세동마을에는 야은당(野隱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 누정을 찾아가며 오늘은 야인(野人)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당쟁과 당파가 끊이지 않던 시대에는 중앙 정치에서 물러나 은거를 택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절의를 꺾는 대신 초야에 묻혀 선비의 도를 지켰던 것이다. 은일(隱逸)은 궁하게 거처할지언정 기백과 절기를 잃을 수 없다는 결의의 발로였다.

오늘의 정치판에서는 아름다운 ‘은인’(隱人)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타인을 밀어내야만 자신이 설 수 있는 비정한 정치판에서 은자의 미학은 세상물정 모르는 또는 패자의 공허한 변명쯤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더러 ‘가짜 야인’들이 주목을 받는다. 외부 압력에 어쩔 수 없이 ‘야인’을 택하는 이들도 있지만 십중팔구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이보후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경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결의를 다지며 화려한 비상을 ‘모사’할 것이다. 그들에게서 은거의 미학을 보여준 조선 선비들의 겸허와 겸양은 말 그대로 고전에나 등장하는 박제된 역사일 뿐이다.

야은(野隱) 김용훈(金容燻·1876~1948)은 조선 말, 구한말의 학자다. ‘야은’이라는 호가 말해주듯 그는 농사에 종사하며 은일의 삶을 살았다. 문헌에 따르면 김용훈은 1893년 1차 과거시험인 향시 초시에 합격했다. 1904년 통훈대부 강릉참봉에 제수되지만 관직에 나가는 대신 고향에 은거하며 모친을 봉양한다. 다음은 김용훈이 쓴 야은당의 ‘원운’(原韻)이다.

“형문(衡門)의 물 맑아 이곳에 서거하니/ 전래의 선대 유업 소홀히 할까 두렵네/ 재주가 없어 무능하니 세상에 쓸모없어/ 한가함을 좋아하니 생애는 넉넉하구나/ 이른 아침 일어나 이랑 막대 옮겨 놓고/ 달을 바라보며 호미 들고 돌아왔다네/ 교자(敎子)하는 서당을 매년마다 열어보니/ 고금 간의 많은 책들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그는 왜 학식과 덕망이 있었음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의 정신을 알현하러 가며 야은(野隱)의 삶은 무엇을 이름할 지 궁금했다. 야은당(野隱堂)은 광주시 서구 세하동 세동마을이라는 농촌에 자리한다.

세하동은 마륵동, 벽진동 등과 행정동이 서창동(西倉洞)에 속한다. 세동마을 뒤로는 백마산이 마을 앞으로는 곡창지대인 서창들녘이 펼쳐져 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서창동이 유서 깊은 지역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조선시대 세곡을 수납하는 창고가 바로 서창이었다. 근동에 기름진 농토와 그 옥토를 적시는 영산강이 있다는 것은 여느 곳과 견줄 수 없는 자부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가을걷이 끝난 강둑 언저리에 허연 머리를 풀어헤친 갈대의 군락이 보인다. 바람에 서걱이는 것이 갈대의 울음인지 메마른 하늘을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인지 가늠할 수 없다. 백미산 줄기 아래 아늑하게 안기듯 들어앉은 마을은 전통의 분위기와 현대적 문물이 침윤하듯 서로를 껴안고 있다.

김용훈이 직접 지은 ‘야은당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떤 늙은 사람이 야은에게 왜 자네는 세상을 피하려 하는가 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산으로 들어간들 나무하며 몸을 숨길 수 없으며 바다에 가 고기를 잡는들 그 또한 몸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이에 야은은 말한다. 충분한 수양이 없는 저잣거리 사람이 마음의 결의없이 산과 바다에 숨는다는 것은 이름을 얻기 위한 사사로운 은거에 불과하다. 작금의 나는 모친을 모시고 어린아이를 길러야 하는 처지일 뿐이다. 뵈올 날이 많지 않은 늙으신 어머니가 있을진대 장차 이 일을 어찌 하겠는가, 라고 묻는다.

김용훈은 조선시대 삽봉 김세근의 후손이다. 특히 김세근(1550~1592)은 임란 때 권율의 휘하 군사로 행주산성 전투 등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그 선조에 그 후손인 격이다. 김용훈은 선조의 유업을 받들어 학행을 쌓았다. 빈민을 구제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시문에도 능했다. 관직에 나가지 않는 대신 세하동에서 초당을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노래하며 만년을 보냈다.

김용훈이 자신의 호를 야은이라 이름한 것은 농사일을 하며 몸을 숨긴다는 의미였다. 촌부의 삶을 살아가며 자연과 벗하는 것을 낙으로 상정했던 것이다.

그의 사후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 1936년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액호를 스승의 호 야은에 맞춰 ‘야은당’이라 칭했다. 일반적인 높은 산, 깊은 물가에 누정을 짓는 것에 비하면 야은당은 들녘에 있어서 그 뜻과 운치가 남다르다.

다음은 김용훈의 ‘원운’에 대한 ‘차운’(次韻)에 해당하는 조영희라는 문사의 ‘근차야은당운’이다. 시문에는 야은의 일상과 정자에 대한 작자의 심상과 정취가 녹아 있다.

“밝고 푸른 산과 물 신선이 있는가/ 야은당 수수한 계략 빠짐없이 치밀하네/ 설월풍화 친구 삼은 그의 고상할 뿐이고/ 금기시주 즐기며 그 날들을 지냈구나/ 지팡이를 들고 너른들 찾아 거닐고/ 호미를 옆에 끼고 들녘을 매었도다/ 뜰을 달린 자제들 명민하고 순하여/ 백망 중인 그 가운데서 글을 읽었구나”

마을 입구에 자리한 누정에서는 한옥문화관과 연계해 다채로운 문화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주말학교, 예절학당을 비롯해 전통놀이 등이 펼쳐진다. 또한 이곳 마을은 ‘서창 만드리 풍년제’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인근 동하마을에는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 등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즐비해 이것들과 연계하면 이색적인 문화벨트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조일형 박사는 “이곳 야은당 누정은 주변의 문화자원과 연계해 다채로운 누정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며 “누정 현판은 물론 누정제영, 주련 등을 창의적으로 활용한다면 관광 상품화 내지 차별화된 콘텐츠 개발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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