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정, 유유자적 자연과 벗하며 세상을 향해 ‘浩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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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정, 유유자적 자연과 벗하며 세상을 향해 ‘浩歌’하다
광주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호남 누정-광주 <15>
조선 중기 선비 유사 1558년 영산강변에 건립
임진왜란·정유재란 거치며 소실돼 1871년 재건
설강‘호가정기’·기정진‘중건기’·유보한‘중수기’…
당대 문사 오겸·이안눌·김성원 편액 만날 수 있어
2023년 10월 29일(일) 18:50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노평산 기슭에 자리한 호가정은 조선 중·명종 대의 설강(雪江) 유사가 만년에 지은 정자다.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풍경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마음에 남아 있는 곳이다. 왜 있지 않는가. 살다보면 까닭 없이 울적해질 때가 있다. 빈 바람이 든 것처럼 마음 언저리가 허허로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처벅처벅 혼자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산과 물,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람이 쉬는 곳을 찾아서 말이다. 그곳은 산수의 정취가 삽상하게 깃들어 어느 곳에 눈을 두어도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그런 곳이다.

호가정(浩歌亭)을 가본 적이 있는가. 시린 강물 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가 오랜 벗의 호의처럼 느껴지는 누정이다. 광산구 본덕동 노평산 기슭에 있다. 광주 도심을 빠져나온 영산강이 나주 관문을 앞두고 잠시 몸을 풀 듯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간이다. 인접한 황룡강과 합수하는 인근이라 비로소 강의 몸피를 입었다 할 수 있다. 이곳에선 가물거리는 은빛의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아도 답답함이 씻겨나간다.

혹여 호가정에 가본 적이 있는 이라면, 우리 유가문화와 전통시가에 대한 일말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호가정은 조선 중·명종 대의 설강(雪江) 유사(1502~1571)가 만년에 지은 정자다. 한마디로 그는 ‘절의(節義)의 선비’였다. 그는 사사로움으로 의를 거스르지 않았는데, 천성적으로 ‘까마귀’ 무리에 섞여들 수 없었다.

호가정에 내리는 가을볕이 따사롭다. 깊어가는 물빛이 예사롭지 않다. 짐작하건대 호가정은 중국 송나라 소강절이 말한 호가지의(浩歌之意)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호가’(浩歌)의 사전적 의미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다. 크게 부르는 노래 자체이기도 하다. 이 누정에 오르면 세상의 저잣거리 일들은 뒤로 밀쳐진다. 정자를 지은 이의 마음을 헤아리다, 이편의 흔들리는 마음 한 자락까지도 너끈히 붙잡게 된다.

과연 그러할 만 하다. 호가정에 오르면 절로 크게 노래를 부르고 싶어진다. 막힘없이 탁 트인 강 저편이 화폭 속 승경처럼 다가온다. 가느다란 강줄기와 수수한 들녘은 외려 수려함을 넘는 정취를 발한다. 호가정을 지은 유사는 이곳에 올라 심중의 답답함을 토설하듯 뱉어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덧없음을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그렇게 간신들의 작태를 꾸짖었을 게다.

호가정은 1558년 세워졌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며 불타 없어졌는데 재건된 것은 1871년이었다. 이후 1932년, 1956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정내에는 설강의 ‘호가정기’, 노사 기정진의 ‘호가정 중건기’, 유보한의 ‘호가정중수기’가 걸려 있다. 당대 거유로 꼽히는 문사인 오겸, 이안눌, 김성원 등의 누정제영을 새긴 편액들도 만날 수 있다.

잠시 호가정을 설명하는 안내문을 찬찬히 읽어본다. ‘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14호’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이곳은 조선 명종 때 유사가 세운 정자이다. ‘호가’라는 명칭은 산수 간에 있는 흥취를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크게 소리내어 노래한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유사는 중종 23년(152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승지로 있을 때 모함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 이곳에서 산수와 시가를 벗삼았다. 정자 안에는 유사의 호가정 원문과 기(記)를 비롯하여 기정진(奇正鎭)의 중건기, 유보한(柳寶漢)의 중수기, 이안눌(李安訥)·오겸(吳謙)·김성원 등의 제영이 있다”

담양 환벽당의 주인 김성원의 사위이기도 한 설강은 스물일곱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등 이른바 3사의 벼슬을 지냈으며 무장현감을 비롯해 전라도사, 삭주부사, 종성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 후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누정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유사의 ‘浩歌-小序’ 시비.
누정 아래 동산에는 몇 기의 시비가 서 있다. 유사가 지은 다음의 시에서 호가정의 유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벼슬을 버리고 남으로 와 병강의 남쪽 구강의 위에서 노닐며 바라보니 좌에는 추월산이 그 수려함을 보여주고 우에는 월출산이 그 우뚝함을 보여주고 동에는 서석산의 굉장함이 서 있고 서쪽에는 금성산의 청기함을 볼 수 있으며 잔잔한 호수가 수백리에 뻗혀서 넓고 넓은 데다 푸른 솔들은 뚝을 둘렀고 하얀 모래는 언저리에 깔려 있다” (‘浩歌-小序와 아울러’ 중에서)

유사는 1545년 을사사화와 1547년 정미사화 때 충신들이 고초를 겪거나 죽는 것을 보고 미련없이 벼슬을 던졌다. 환멸이었을 것이다. 그는 부러질지언정 휠 수는 없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당파 싸움은 이상정치를 주창했던 조광조 등 학식이 뛰어나고 곧은 선비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유사가 강호로 내려온 것은 지조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초야에 묻혀 그는 당대 명유들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이후 한때 실권을 쥐고 정치를 농락했던 이량 일파가 물러나자, 조정에서 다시 중용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러나 유사는 더 이상 벼슬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후학을 양성하다가 1571년 향년 71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한다. 당시 유림들이 그의 학덕과 기절(氣節)을 기려 경렬사를 지어 뜻을 받들었다. 특히 그가 남긴 ‘설강유고집’, ‘위친필봉제축유서’는 학문과 시문을 집약한 문집으로 유명하다.

호가정 앞 정원의 풍경.
호가정을 이곳저곳 둘러보니 조선 선비 설강을 알현한 듯하다. 이제 보니 ‘설강’(雪江)이라는 호 또한 사뭇 시적이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운 설경일지언정, 눈 또한 강을 덮지 못한다는 의미일까. 아마도 한겨울에도 강심(江心)은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같은 변란은 조광조와 박상, 유관 같은 학문과 절의가 뛰어난 선비들을 사지로 내모는 등 피로 얼룩진 역사를 만들었다”며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한 유사는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했다”고 밝혔다.

정자에서 강 너머를 보니 사방이 트여 걸림이 없다. 유사는 이곳에서 산과 하늘과 구름을 보며 세상을 향해 ‘호가’했을 것이다. 유유자적 자연과 함께하며 그만의 방식으로 이상적 삶을 희구했을 것이다.

다음은 아름다운 풍광을 읊은 오언절구의 시다. 고향으로 내려온 심사를 풍광에 빗대어 지은 시는 5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눈앞에 현현돼 있다. 설강은 없지만 그의 시가 남아 쓸쓸한 가을 강을 다독이고 있다.

“돌베개에 솔 그림자 아른거리고/ 바람은 난간을 돌아 들빛에 둘러 있네/ 차가운 강물 위 밝은 달빛 아래/ 눈을 실은 작은 배가 돌아온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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