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뮌헨] 대학서 법원까지…도심 곳곳 나치에 맞섰던 백장미단 흔적
뮌헨대 백장미기념홀 전단지, 체포·처형까지의 기록·서적 등 전시
레지엔츠 왕궁 정원 ‘호프 가르텐’ 백장미단 기념 화강암 조각상
사형선고 뮌헨 법원엔 하얀 장미와 함께 희생단원 사진 등 고스란히
레지엔츠 왕궁 정원 ‘호프 가르텐’ 백장미단 기념 화강암 조각상
사형선고 뮌헨 법원엔 하얀 장미와 함께 희생단원 사진 등 고스란히
![]() 1943년 2월 18일 백장미단 한스 숄, 소피숄 남매가 히틀러와 나치에 반대하는 전단지를 뿌리다 게쉬타포에게 체포된 뮌헨대 본관 홀. |
취재를 하면서 계속 그들의 ‘청춘’을 떠올렸다. 꽃다운 20대를 다 보내지도 못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그들의 다가오지 않은 미래도 떠올렸다. 그리고, 모두가 침묵할 때 과감히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뮌헨 대학교 ‘백장미단 기념홀(White Rose Memorial Hall)’에서 떠오른 단상이다.
백장미단은 뮌헨대 학생들과 철학과 교수 쿠르트 후버가 참여한 저항 단체로 히틀러와 나치의 독재, 유대인 학살, 전쟁의 참상을 비판하는 전단지를 배포한 후 체포돼 처형됐다. ‘백장미단’의 이야기는 80여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뮌헨은 베를린, 함부르크에 이어 독일에서 세번째로 규모가 큰 도시다. 전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잡은 맥주축제, BMW박물관,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 알테 피나코테크 등으로 대표되는 미술관 등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
뮌헨의 또 다른 모습은 나치와의 인연이다. 뮌헨은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된 곳이고, 나치 본부 건물도 이 곳에 있어 나치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뮌헨 외곽의 다하우수용소는 나치가 제일 먼저 세운 강제수용소였다.
9월말 찾은 뮌헨은 3년만에 재개된 맥주축제로 도시 전체가 들썩거렸다. 백장미단의 흔적을 찾는 첫 여정은 뮌헨대학에서 시작됐다. 오데온, 마리온 광장 등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구도심을 지나 높게 솟은 개선문을 통과하면 도로 양 옆으로 뮌헨대학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백장미 재단이 운영하는 뮌헨대 본관의 ‘백장미기념홀’. 그리 크지 않은 전시관엔 비가 오는 궂은 날임에도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이 차분히 관람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학시절 필독서 중 하나였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떠올려 본다. 소설을 쓴 잉게 숄은 백장미의 리더인 한스 숄의 누나이자 백장미 단원 소피 숄의 언니다. 백장미단의 이야기는 나중에 영화 ‘백장미’(1982)와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5)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스 숄, 소피 숄,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그리고 후버 교수. 그들은 전쟁과 국가사회주의 범죄에 반대했다. 전단지를 통해 나치독재로부터의 저항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같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기념홀에는 당시 뿌렸던 전단지, 백장미단이 발각되고 재판받고 처형되기까지의 과정의 기록, 각국에서 출간된 관련 서적 등이 전시돼 있다.
백장미단은 모두 6차례 강렬한 의견을 담은 전단지를 발간했다. 1942년 여름 의대생 한스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은 ‘화이트 로즈 인 뮌헨’이라는 이름으로 첫번째 리플렛을 발행했다. 이후 폴란드에서 벌어진, 유태인을 상대로 한 ‘인간 존엄’에 반(反)하는 테러를 경고하고,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독일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습니다. 맹목적으로 거짓말쟁이들을 따라 폐허를 향할 뿐입니다.”라고 외쳤고, ‘프리덤’이라는 단어를 공공 건물에 페인트로 쓰기도 했다. 1943년 2월 후버교수는 여섯번째 전단지를 통해 살인자 정부에 저항할 것을 독려한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기념홀 바로 뒤 넓은 중앙홀로 들어섰다. 2월 18일 한스 숄 남매가 전단지를 뿌리다 게쉬타포에게 붙잡힌 장소다.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홀 벽면에는 두 개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6명의 희생자 모습과 이름을 적은 추모비와 조피 솔의 조각상이다. 그들 곁에는 하얀 장미가 놓여 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들어갈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광장 바닥의 조각품이 눈에 띄었다. 백장미 단원들의 사진과 생애, 그들이 제작한 전단지, 추모사, 처형 당시 신문 등을 새긴 작품이다. 마치 뿌려진 전단지가 사방에 흩어져 있듯 광장 곳곳에서 만나는 작품은 발길을 멈추게 한다.
본관 앞과 도로 맞은편 대학 건물 광장에는 똑같은 모양의 분수가 자리하고 있고, 본관 앞은 숄남매 광장, 반대편은 후버 광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등으로 유명한 슈바빙 거리를 지나 숄남매가 살았던 집을 만났다. 이 곳이 그들의 집이었음을 알리는 현판만이 붙어 있을 뿐이지만 이곳에서 바로 옆 뮌헨대학을 다니며 평범한 대학생의 삶을 살았을 그들을 떠올리니 뭉클하다.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레지엔츠 왕궁의 정원 호프 가르텐에서도 백장미단 기념하는 검은 화강암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다음날 고풍스러운 뮌헨 법원을 찾았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 소지품 검사를 마친 후 백장미단의 첫번째 재판이 열렸돈 253호 법정을 찾았다. 숄 남매와 프롭스트는 2월22일 이곳에서 열린 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같은 날 교수형을 당한다. 가을에는 후버 교수 등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백장미단 기념관으로 쓰이는 법정에 놓인 하얀 장미, 앳된 얼굴의 백장미 단원들의 사진, 사진 아래 붙은 사망일자와 나이, 그리고 각종 자료는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역사임을 보여준다.
백장미단의 흔적은 뮌헨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뮌헨 공립기숙사 단지에는 백장미 단원들의 이름을 딴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길, 빌리 그라프 길이 있고 숄 남매 이름을 딴 학교와 거리도 많다
‘자유를 위하여’. 한스 숄이 처형 전에 했던 말이라고 한다. 소피 숄은 기소장 뒷면에 ‘자유’라고 썼다. 백장미단은 개인의 자유,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맞섰고 그들의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인권, 자유, 관용, 독립을 열망하며 차별과 폭력, 인종주의에 반대해서 싸운 인류의 보루였다.
/뮌헨·글 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백장미단 추모 조각(왼쪽)과 뮌헨대 본관 앞 건물 바닥에 새겨진 백장미 기념 조형물. |
뮌헨의 또 다른 모습은 나치와의 인연이다. 뮌헨은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된 곳이고, 나치 본부 건물도 이 곳에 있어 나치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뮌헨 외곽의 다하우수용소는 나치가 제일 먼저 세운 강제수용소였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백장미 재단이 운영하는 뮌헨대 본관의 ‘백장미기념홀’. 그리 크지 않은 전시관엔 비가 오는 궂은 날임에도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이 차분히 관람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학시절 필독서 중 하나였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떠올려 본다. 소설을 쓴 잉게 숄은 백장미의 리더인 한스 숄의 누나이자 백장미 단원 소피 숄의 언니다. 백장미단의 이야기는 나중에 영화 ‘백장미’(1982)와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5)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스 숄, 소피 숄,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그리고 후버 교수. 그들은 전쟁과 국가사회주의 범죄에 반대했다. 전단지를 통해 나치독재로부터의 저항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같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기념홀에는 당시 뿌렸던 전단지, 백장미단이 발각되고 재판받고 처형되기까지의 과정의 기록, 각국에서 출간된 관련 서적 등이 전시돼 있다.
![]() 백장미 단원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뮌헨 법원 253호 법정. |
전시장을 둘러보고 기념홀 바로 뒤 넓은 중앙홀로 들어섰다. 2월 18일 한스 숄 남매가 전단지를 뿌리다 게쉬타포에게 붙잡힌 장소다.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홀 벽면에는 두 개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6명의 희생자 모습과 이름을 적은 추모비와 조피 솔의 조각상이다. 그들 곁에는 하얀 장미가 놓여 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들어갈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광장 바닥의 조각품이 눈에 띄었다. 백장미 단원들의 사진과 생애, 그들이 제작한 전단지, 추모사, 처형 당시 신문 등을 새긴 작품이다. 마치 뿌려진 전단지가 사방에 흩어져 있듯 광장 곳곳에서 만나는 작품은 발길을 멈추게 한다.
본관 앞과 도로 맞은편 대학 건물 광장에는 똑같은 모양의 분수가 자리하고 있고, 본관 앞은 숄남매 광장, 반대편은 후버 광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등으로 유명한 슈바빙 거리를 지나 숄남매가 살았던 집을 만났다. 이 곳이 그들의 집이었음을 알리는 현판만이 붙어 있을 뿐이지만 이곳에서 바로 옆 뮌헨대학을 다니며 평범한 대학생의 삶을 살았을 그들을 떠올리니 뭉클하다.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레지엔츠 왕궁의 정원 호프 가르텐에서도 백장미단 기념하는 검은 화강암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 뮌헨대 본관에 자리한 백장미기념홀 |
백장미단 기념관으로 쓰이는 법정에 놓인 하얀 장미, 앳된 얼굴의 백장미 단원들의 사진, 사진 아래 붙은 사망일자와 나이, 그리고 각종 자료는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역사임을 보여준다.
백장미단의 흔적은 뮌헨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뮌헨 공립기숙사 단지에는 백장미 단원들의 이름을 딴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길, 빌리 그라프 길이 있고 숄 남매 이름을 딴 학교와 거리도 많다
‘자유를 위하여’. 한스 숄이 처형 전에 했던 말이라고 한다. 소피 숄은 기소장 뒷면에 ‘자유’라고 썼다. 백장미단은 개인의 자유,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맞섰고 그들의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인권, 자유, 관용, 독립을 열망하며 차별과 폭력, 인종주의에 반대해서 싸운 인류의 보루였다.
/뮌헨·글 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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