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하>] 도심 곳곳에서 역사를 마주하다
브란덴부르크문 인근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 눈길
‘나치에 학살당한 집시 추모물’…케테콜비치 작품 자리한 ‘노이에바헤’
베벨광장 ‘도서관’, 유대인 학자 책 불태운 야만적 행태 경고 조형물
‘나치에 학살당한 집시 추모물’…케테콜비치 작품 자리한 ‘노이에바헤’
베벨광장 ‘도서관’, 유대인 학자 책 불태운 야만적 행태 경고 조형물
![]() 2711개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구성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 |
베를린 박물관섬 일대를 걷다 예전 방문 때 보지 못한 제임스 시몬 갤러리를 발견했다. 고전적인 양식의 다른 박물관과 달리, 모던한 느낌으로 지어진 공간은 베를린의 가장 ‘핫한’ 공간 중 하나가 됐다.
베를린은 이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면서 동시에 역사를 기억하고 참회하는 공간들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은 역사를 만나는 장소를 찾아 공들여 현장을 탐색하고 자료를 세심히 관람하는 ‘진지한 관람자’의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브란덴부르크문 인근 등 도심 한복판에 관련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는 게 놀라웠다. 광주의 전남도청처럼 역사의 ‘현장’이 아님에도 말이다.
대표적인 게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600만 유대인을 추모하는 이 조형물은 2711개의 회색빛 콘크리트 블록으로 이루어졌다. 각각의 블록은 길이 2.38m, 폭 0.95m로 일정하지만, 높이는 0.2m부터 4.7m까지 다양하다. 낮은 블럭 사이사이를 지나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블럭을 맞딱트릴 때면 순간, 압박감이 느껴지며 묘한 기분이 든다. 블럭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멀리 서 있는 나무를 발견하고는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참 줄을 선 후 지하 정보 센터에 들어갔다. 유대인들의 일기, 편지, 유서 등이 전시된 여러 공간 중 인상적인 곳은 ‘가족의 방’이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15 가족의 사진과 영상자료들은 홀로코스트 이전의 평온한 삶과 대비돼 죽음에 이른 그들의 삶을 더욱 애틋하게 해준다. ‘이름의 방’에서는 홀로코스트로 사라지거나 죽은 사람들의 이름과 짧은 전기를 만날 수 있다. 이 기록을 다 읽는 데 6년여가 걸린다는 안내문이 와닿는다. 전 세계 수용소에서 죽어간 그들의 모습을 접하고, 다시 콘크리트 블록들 사이를 걸을 때는 또 다른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치에 학살 당한 유럽의 집시 추모물’은 브란덴부르크문 맞은편 공원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 조각가 다니 카라반이 설계한 이곳은 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장점이 돋보인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집시 말살 연대기가 적힌 가림막을 지나, 얼핏 불협화음처럼 들리기도 하는 첼로 음악이 흐르는 공간으로 들어서면 둥근 수조처럼 생긴 조형물이 보인다.
불규칙한 모형으로 바닥에 박혀 있는 돌에 새겨진 건 그들이 끌려간 강제수용소의 이름이다. 수조 한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조형물 위에는 꽃다발이 놓여있다. 사람들은 조형물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물 위로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본다.
이번 취재의 길라잡이가 되어 준 ‘베를린, 기억의 미술관’(반비 간·백종옥 지음)을 읽고 가장 가보고 싶었던 장소는 노이에바헤다. 1816년 지어진 건물은 왕의 경비소로, 세계대전 전사자를 추모하던 공간으로, 나치에 의해 왜곡된 공간으로 숱한 변화를 거쳐왔고, 1993년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을 위한 중앙 추모소’가 됐다.
건물로 들어서기 전 베를린의 케테 콜비치미술관을 소개하는 안내판을 만났다. 콜비치의 석판화 ‘어머니’가 새겨져 있다. 겁에 질린 듯한 아이들을 품 안에 소중히 안고 있는 엄마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콜비치는 1차 대전에서 아들 페터를, 2차 대전에서 손자 페터를 잃었다.
노이에바헤에 들어선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 중앙에 놓여 있는 건 콜비치의 작품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다. 피에타 형식을 취한 작품은 웅크린채 죽은 아들을 어머니가 온몸으로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다. 자식을 잃은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지 않을까.
높은 천정의 둥근 창으로는 푸른 하늘과 흰구름이 흘러간다. 흐린 날에는 흐린 날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창으로 쏟아지는 ‘빛’은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 다양한 모습을 남긴다. 백종옥의 말처럼 “건축공간, 미술작품, 자연조망이 최소한의 요소로 이루어진 공간은 역사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이끄는 힘” 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등이 자리한 노이에바헤 바로 옆 베벨 광장을 방문하면 사람들이 모여 발 밑의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눈에 띈다. 미하 울만의 작품 ‘도서관’이다. 제목은 도서관이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도서관의 형태는 없다. 가로 120㎝ 세로 120㎝ 크기의 사각형 투명 창 아래 밀폐된 공간에는 14개의 하얀 책장이 설치돼 있고, 책장은 모두 비어 있다.
1933년 5월10일 밤 10시. 이곳에서는 프로이트, 고리키 등 유대인 작가의 책 2만권의 책을 불태우는‘책들의 화형식’이 펼쳐졌다. 작품 ‘도서관’은 이 야만적인 행태를 되새기는 조형물이다. 다음날 밤, 다시 베벨 광장을 찾았을 땐 어둠 사이로 ‘도서관’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서 홀로 음악을 켜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슈베르트 ‘세레나데’ 선율이 묘한 여운으로 남았다.
베를린 외곽 그루네발트역으로 간다. 19941년부터 45년까지 베를린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실어날랐던 곳이다. 1941년 10월8일 17번 선로에서 수용소로 끌려가는 첫 열차가 출발했다. ‘1944년 5월19일/유대인 24명/베를린-아우슈비츠’ 132m 선로를 따라 승강장 바닥에 설치된 186개의 동판은 그들이 죽음의 장소로 끌려갔음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호수 위 카누를 타는 사람들과 화려한 요트 수십대가 즐비하다. 베를린의 대표적인 휴양마을에 자리한 ‘반제회의 집’은 1942년 유태인 말살을 최종 결정했던 반제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이곳의 상설전시실에서는 ‘당시’의 일과 홀로코스트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베를린 분단·통일의 상징 ‘베를린 장벽 추모공원’
베를린은 분단과 통일을 상징하는 역사 공간도 여럿 품고 있다.
1961년 8월13일부터 1989년 11월 9일까지 28년간 베를린은 3.6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에 의해 동서로 양분됐고 1990년 10월3일 재통일됐다.
독일 통일 후 1.5km 가량의 베르나워 거리 일대는 베를린 장벽 추모공원으로 조성됐다. ‘장벽과 죽음의 지역’ 등 4개의 지역으로 이뤄진 추모공원은 베를린 장벽에서 희생된 131명의 초상사진이 걸린 ‘추모의 창’, 동베를린 국경지역에 남겨져있다 1985년 폭파된 ‘화해의 교회’를 재건한 ‘화해의 예배당’ 등이 눈길을 끈다. 베를린 장벽을 활용한 이스트갤러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갤러리로 불린다.
1.3km에 달하는 장벽에는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구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의 키스장면이 담긴 드미트리 브루벨의 ‘신이시여, 이 치명적인 사랑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카니 알라비의 ‘그것은 11월에 일어났다’ 등 수많은 작품들이 그려져 있다.
장벽의 일부는 소니센터 등이 자리한 포츠담 광장이나 거리 곳곳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베를린은 이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면서 동시에 역사를 기억하고 참회하는 공간들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은 역사를 만나는 장소를 찾아 공들여 현장을 탐색하고 자료를 세심히 관람하는 ‘진지한 관람자’의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브란덴부르크문 인근 등 도심 한복판에 관련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는 게 놀라웠다. 광주의 전남도청처럼 역사의 ‘현장’이 아님에도 말이다.
![]()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게 하는 조형물. |
![]() 케테 콜비치의 조각상이 놓인 노이에바헤. |
불규칙한 모형으로 바닥에 박혀 있는 돌에 새겨진 건 그들이 끌려간 강제수용소의 이름이다. 수조 한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조형물 위에는 꽃다발이 놓여있다. 사람들은 조형물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물 위로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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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 들어서기 전 베를린의 케테 콜비치미술관을 소개하는 안내판을 만났다. 콜비치의 석판화 ‘어머니’가 새겨져 있다. 겁에 질린 듯한 아이들을 품 안에 소중히 안고 있는 엄마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콜비치는 1차 대전에서 아들 페터를, 2차 대전에서 손자 페터를 잃었다.
![]() 베를린 장벽 추모공원에 자리한 화해의 예배당. |
높은 천정의 둥근 창으로는 푸른 하늘과 흰구름이 흘러간다. 흐린 날에는 흐린 날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창으로 쏟아지는 ‘빛’은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 다양한 모습을 남긴다. 백종옥의 말처럼 “건축공간, 미술작품, 자연조망이 최소한의 요소로 이루어진 공간은 역사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이끄는 힘” 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등이 자리한 노이에바헤 바로 옆 베벨 광장을 방문하면 사람들이 모여 발 밑의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눈에 띈다. 미하 울만의 작품 ‘도서관’이다. 제목은 도서관이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도서관의 형태는 없다. 가로 120㎝ 세로 120㎝ 크기의 사각형 투명 창 아래 밀폐된 공간에는 14개의 하얀 책장이 설치돼 있고, 책장은 모두 비어 있다.
1933년 5월10일 밤 10시. 이곳에서는 프로이트, 고리키 등 유대인 작가의 책 2만권의 책을 불태우는‘책들의 화형식’이 펼쳐졌다. 작품 ‘도서관’은 이 야만적인 행태를 되새기는 조형물이다. 다음날 밤, 다시 베벨 광장을 찾았을 땐 어둠 사이로 ‘도서관’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서 홀로 음악을 켜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슈베르트 ‘세레나데’ 선율이 묘한 여운으로 남았다.
![]() 나치에 학살당한 유럽의 집시 추모물. |
아름다운 호수 위 카누를 타는 사람들과 화려한 요트 수십대가 즐비하다. 베를린의 대표적인 휴양마을에 자리한 ‘반제회의 집’은 1942년 유태인 말살을 최종 결정했던 반제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이곳의 상설전시실에서는 ‘당시’의 일과 홀로코스트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베를린 분단·통일의 상징 ‘베를린 장벽 추모공원’
베를린은 분단과 통일을 상징하는 역사 공간도 여럿 품고 있다.
1961년 8월13일부터 1989년 11월 9일까지 28년간 베를린은 3.6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에 의해 동서로 양분됐고 1990년 10월3일 재통일됐다.
독일 통일 후 1.5km 가량의 베르나워 거리 일대는 베를린 장벽 추모공원으로 조성됐다. ‘장벽과 죽음의 지역’ 등 4개의 지역으로 이뤄진 추모공원은 베를린 장벽에서 희생된 131명의 초상사진이 걸린 ‘추모의 창’, 동베를린 국경지역에 남겨져있다 1985년 폭파된 ‘화해의 교회’를 재건한 ‘화해의 예배당’ 등이 눈길을 끈다. 베를린 장벽을 활용한 이스트갤러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갤러리로 불린다.
1.3km에 달하는 장벽에는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구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의 키스장면이 담긴 드미트리 브루벨의 ‘신이시여, 이 치명적인 사랑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카니 알라비의 ‘그것은 11월에 일어났다’ 등 수많은 작품들이 그려져 있다.
장벽의 일부는 소니센터 등이 자리한 포츠담 광장이나 거리 곳곳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