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상>] 도시 전체가 거대한 기억과 추모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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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상>] 도시 전체가 거대한 기억과 추모의 공간
‘홀로코스트’ 기념물
학살된 유럽 유대인 2771개 추모비
‘슈톨퍼슈타인’
나치가 추방·살해한 이들의 추모동판
‘삶의 열차, 죽음의 열차’
수용소로 끌려가는…탈출해 살아남은
2022년 11월 01일(화) 23:00
프리드리히스트라세역에서 만난 ‘삶의 열차, 죽음의 열차 1938~1945(Trains to Life-Train to death’ 1938~1945) 작품 중 강제 수용소로 떠나는 아이들의 모습.
몇년 만에 다시 찾은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집회가 한창이었다. 다양한 문구가 적힌 종이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작은 그룹도 여럿 보였다. 또 다른 쪽에서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며 모금을 하는 여가수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문득, 독일 사람들에게 ‘전쟁’의 의미는 좀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기억의 공간이다. 베를린의 중심지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에는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이 눈길을 끈다. 대표적인 게 2771개의 추모비로 이뤄진 홀로코스트 기념물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다. 광주 충장로 파출소 앞 폴리 ‘99칸’을 설계하기도 한 피터 아이젠만의 작품인 이 조형물은 도심 한복판에서 역사를 환기시킨다. 이번 취재에서 만난 ‘나치에 학살당한 유럽의 집시 추모물’도 인상적이었다.

베를린에는 이처럼 규모가 큰 기념물도 많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만나는 기념물이 인상적이다. 삶과 괴리되지 않는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베를린에 3박4일 머무는 동안 자주 고개를 숙여 바닥을 살폈다. 길거리 바닥에 박혀있는 작은 추모 동판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이 동판 조형물은 ‘슈톨퍼슈타인(Stoplerstein)’ 프로젝트를 통해 설치된다.

‘삶의 열차, 죽음의 열차 1938~1945’ 중 영국으로 떠나 목숨을 건진 아이들.
이 프로젝트는 베를린 출신 작가 군터 뎀니히가 1992년 쾰른에서 시작했고 1996년부터는 베를린에서도 진행됐다. 취재 중 만난 안나 바르다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에 따르면 2022년 9월 현재 전 세계 30국에 9만4000여개가 설치돼 있다. 베를린에서는 모두 9000개를 만날 수 있다.

지난 2016년 한국을 방문한 군터 뎀니히는 제1225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서 독일에서 제작해온 동판 2개를 기증하기도 했다. 동판에는 ‘이름 없는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를 기억하며’라는 글이 한국어와 독일어로 각각 담겼다.

‘걸려 넘어지다’는 뜻의 ‘Stoplern’과 ‘걸림돌, 장애물’을 뜻하는 ‘Stein’을 합친 말인 ‘슈톨퍼슈타인’은 ‘걸려 넘어지는 돌’이라는 뜻이지만, 땅속에 묻혀 표면만 보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다. 그럼에도 프로젝트에 이런 이름을 단 작가는 ‘머리(Head)와 가슴(Heart)’으로 나치의 희생자를, 역사를 기억하길 바랬다.

이 프로젝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가 추방하거나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한다. 유대인 뿐 아니라 정치치범, 집시, 동성애자 등 모든 피해자를 아우른다.

추모석은 희생자가 살았던 집 앞에 설치된다. 무언가를 기념하는 특별한 장소가 아닌, 각자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을 기억하고, 사라졌던 이름을 돌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의미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도 느꼈지만, 역사는 개인의 삶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흑백 사진, 흑백 영상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춤추는 ‘가족’ 들 중 누군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쳤다는 글귀를 읽는 순간, 탄식이 터졌다.

추모조형물은 가로, 세로, 높이 각 10㎝크기의 돌로 제작하고, 그 표면에 동판을 부착한다. 동판에는 희생자 이름, 태어난 해, 추방된 해, 사망 장소 등을 간략하게 적는다. 추모석은 작가가 수작업으로 만들고 설치한다. 하나의 추모석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120유로로 모두 기부금으로 충당된다. 최근에는 한달에 전 세계에서 약 700개 정도의 작업이 이뤄진다고 하는데 300일을 전 세계 여행중인 작가는 500여개는 직접 설치하고 일부 지역은 동판을 현지로 보내주면 시민들이 직접 설치하기도 한다.

베를린 안네 프랑크 센터
프로젝트 팀원 중에는 베를린의 학교 방문을 전담하는 이가 있다. 관련 자료를 배포하고, 함께 역사를 공부하고 조형물을 직접 찾아가 본다. 또 학생들이 영상을 제작하고 전시를 꾸리며 홈페이지 제작 경연을 펼치기도 한다. 조형물을 세제로 닦고 관리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시민모임도 자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작은 추모 조형물은 일부러 보러가는 게 아니라, 길을 걷다가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됩니다. 일상속에서 계속 생각을 하고, 역사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문득문득 떠올려보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잊지 말고 기억하자, 다시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는 마음들이죠. 5년 전까지만해도 나이드신 분들의 참여가 높았는데, 최근엔 부모세대에게 이야기를 들은 1970년대생들의 관심이 높아졌어요.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고 배우며 지금의 정치 현실까지도 역사까지도 함께 생각해보는 겁니다.” (안나 바르다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 또 어딘가에서 도착하는 사람들이 오고가는 기차역에서 만난 조각 작품도 잊을 수 없다. 베를린의 대표역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스트라세역에서 만난 ‘삶의 열차, 죽음의 열차 1938~1945(Trains to Life-Train to death’ 1938~1945).

슈돌퍼슈타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군터 뎀니히 작가
옷주름, 표정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조각 작품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7명의 아이가 등장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밝은 구리빛 동으로 제작된 두 아이의 표정은 밝아 보인다. 인형을 품에 안고 가방을 든채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다. 반면 반대쪽에 자리한 다섯명의 아이들 표정은 마냥 어둡고 무겁다. 어두운 색깔의 동으로 제작된 아이들의 어깨는 쳐져 있고, 겁에 질린듯 자포자기한 모습이다. 누군가가 한 소녀의 손에 안겨준 꽃다발이 서글퍼 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두 명의 아이는 곧 나치에게 점령될 동유럽 국가들에서 기차를 타고 영국 등으로 건너가 목숨을 건진 1만명의 아이들을 상징한다. 다섯명의 아이는 홀로코스트 기차에 태워져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살해된 유대인 어린이를 표현했다.

1938년부터 45년까지 ‘영국의 쉰들러’로 불리는 컬러스 윈턴 등 뜻있는 이들에 의해 많은 어린이들이 생명을 얻었다. 1939년 기차를 타고 체코를 탈출해 살아남은 아이들 중 한명이었던 작가 프랭크 마이슬러는 첫 열차가 떠난 지 70년이 지난 2008년 기차가 거쳐갔던 프리드리히스트라세 역에 이 작품을 세웠다. 이 연작은 영국 런던, 독일 함부르크 등에도 설치돼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버스정류장도 역사의 기록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제국보안본부 유대인 담당분과의 사무실이 있던 자리인 쿠르퓌르스텐 거리 실슈트라세 정류장에서는 ‘역사적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독일 등 점령 지역 유대인 강제 이송 및 학살을 지휘했던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정류장에는 ‘경고하는 장소’라는 의미의 독일어 ‘만 오르트(MAHN ORT)’와 아이히만의 사진이 실린 광고판이 있다. 바로 이곳이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대학살을 지휘했던 장소임을 되새기게 해준다.

나치에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슈톨퍼슈타인(Stoplerstein)’ 프로젝트. <STIFTUNG-SPUREN-Gunter Demnig 제공>
예술가의 아지트로 불리는 슈바르첸베르크 하우스를 찾아갔다 우연히 만난 공간도 인상적이었다. 낡은 폐허같은 건물에 온갖 그래피티로 뒤덮인 공간은 예술가들의 점령으로 공방, 갤러리, 식당으로 변모해 사용중이었고 이 곳 3층에 안네 프랑크 센터가 있었다.

베를린에서 열렸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 집’ 순회전시 이후 만들어진 공간으로막 태어난 안네의 모습부터 15살의 나이로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사진을 붙여놓은 계단을 올라가면 만나는 소박한 전시공간에서는 안네의 일기장 등을 만날 수 있다. 방문할 날에는 학생들이 참여해 프로그램을 진행중이었다. 역사를 잊지 않고 이어가고 있는 현장이었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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