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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무주 김환태문학관
“비평의 대상은 오직 문학이다”… 순수 비평의 선구자
일제 강점기 이념·사상에 물든 비평계 새 관점 제시
국어 말살 정책에 절필선언…결핵으로 35세 짧은 삶
신라·백제의 관문이던 나제통문 옆 문학 기념비 ‘이채’
무주 구천동의 문학관, 이웃 공예공방과 문화벨트 형성
2020년 05월 25일(월) 00:00
전북 무주군에 있는 김환태 문학관은 일제 강점기 카프에 경도돼 있던 비평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순수 비평의 씨앗을 틔운 김환태 문학의 혼과 삶이 응결된 곳이다.
“나는 상징의 화원에 노는 한 마리 나비이고자 한다. 아폴로의 아이들이 가까스로 가꾸어 형형색색으로 곱게 피워놓은 꽃송이를 찾아 그 미에 흠뻑 취하면 족하다. 그러나 그 때의 꿈이 한껏 아름다웠을 때는 쉬운 그 꿈을 말의 실마리로 얽어놓으려는 안타까운 욕망을 가진다. 그리하여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소위 나의 비평이다.”

비평가 김환태의 ‘평단 전망’ 중에서 발췌한 김환태 문학비평의 길이다. 그는 문학비평의 본질이 무엇이며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에게는 순수문학의 옹호자로서, 순수 비평의 씨앗을 틔운 주인공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주군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에 있는 나제통문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있던 곳이다.
눌인(訥人) 김환태(1909~1944).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비평사에 한 획을 그은 문인이다. 서구의 심미적 비평가였던 매슈 아널드와 월터 페이터 등을 한국 문단에 소개했으며 당시 카프에 경도돼 있던 비평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1920~1930년대 문단은 유행처럼 번진 이념성과 사상성으로 순수 문학의 입지가 약화돼 있었다. 계급주의적 비평이 문학을 도구화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문학이 정치에 예속되는 양상이 가속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김환태는 “문학비평의 대상은 사회도 정치도 사상도 아니요 문학이다”라고 주창했다.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 자체로 위대한 힘을 내재하고 있다는 의미다.

김환태의 호는 ‘눌인’(訥人)이다. “어눌한 사람”이라는 뜻이 말해주듯 그는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이었다. 그의 성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눌인’이라는 호는 역설적으로 그가 결코 ‘어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비평문학과 순수문학에 있어 김환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명민하며 뛰어난 감수성과 심미안을 지닌 비평가다.

전북 무주 덕유산 국립공원 입구에는 ‘눌인 김환태 문학 기념비’가 있다. 나제통문(羅濟通門) 옆에 세워진 문학비는 지난 1986년 제막됐으며 김동리, 박두진, 백철 씨 등 문인 45명과 유족 등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모던하고 세련된 문학비는 여느 문인들의 그것과는 변별되는 이채로운 형상이다. 김환태의 문학 정신과 추구했던 비평의 세계가 아름다운 조각에 투영돼 있는 듯하다.

나제통문 옆에 있는 김환태 문학비.
무엇보다 나제통문 바로 옆에 문학비가 있어서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 기암절벽을 뚫어 만든 이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의 관문이었다. 무주구천동 입구에 위치하며 덕유산국립공원에 속한다. 구천동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시원스레 통문 아래 다리를 타고 흘러간다. 최근에 내린 비로 계곡은 불어 남실거리고, 물소리는 산세에 휘감겨 상쾌하다.

아름다운 산세와 계곡 언저리를 배경삼아 서 있는 문학비를 보다 말고 서둘러 비평가 김환태를 알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문학사에서 그다지 알려진 문인은 아니다. 문학을 공부하는 전공자들도 한두 번 이름을 들어봤어도 그가 어떠한 비평가인지는 잘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문학을 접하는 데 있어 주류 장르, 일테면 시와 소설, 희곡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서 잠시 김환태의 생애를 대강 더듬어 보자. 그는 1909년 11월 29일 무주에서 태어났다. 1916년 무주보통학교에 입학해 1921년 졸업했으며 1926년 보성고보 2학년 편입해 1928년 3월에 졸업했다. 1928년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정지용을 만나 문학적인 교류를 한다. 1931년 도시샤대를 수료하고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1934년 규수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36년 구인회에 가입해 김상용, 이태준, 정지용, 김영랑, 김기림, 박태원, 이상, 김유정 등과 교유하며 문학의 순수성을 견지하는 활동을 펼친다. 이후 광주 광산의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박봉자)과 결혼을 하고 명신중 교사와 무학여고 교사로 근무한다. 그러다 1940년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이 강화되고 일본 보국문학이 기세를 떨치자 더 이상 글쓰기를 지속할 수 없다 판단하고 절필을 선언한다. 1943년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고향 무주로 내려왔으며, 이후 1944년 향년 35세로 세상을 뜨고 만다.

김환태문학관은 전통공예문화촌에 자리한다. 이곳 공예문화촌에는 김환태문학관을 비롯해 최북미술관, 전통공예공방이 함께 들어서 있다. 문화의 집결지 내지는 문화클러스터라 해도 될 만큼 문학관과 미술관, 공방이 서로 이웃하며 하나의 문화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최북은 무주가 배출한 조선 후기 화단의 거장으로 꽃과 풀, 새, 고목, 호랑나비를 잘 그렸다. 기이한 행동과 특이한 술버릇으로 유명했다 한다. 당시 중국 산수를 그리는 풍토에 반발해 조선의 진경 산수화를 고집했으며 파격적인 조형양식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다양한 자료가 비치돼 있는 문학관 내부.
지난 2012년 건립된 문학관에는 김환태의 어록 및 철학, 그의 문학정신을 총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자료와 영상이 비치돼 있다. 또한 유학 후 귀국 활동, 일본 규슈대학의 졸업논문, 출생과 성장기, 구인회 활동 등의 자료도 보인다.

이곳에서는 매년 가을 눌인 김환태 문학제를 개최한다. 눌인김환태문학제전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학사상사와 눌인문학회가 주관하며 전북문인협회와 무주군이 후원한다. 문학제가 개최되는 시기에는 김환태 비평 정신을 기리고 계승한 문인을 선정해 평론문학상을 시상한다. 지금까지 김윤식, 김주연, 권영민, 조남현, 정호웅, 권택영, 최동호, 이동하, 최헤실, 우찬제, 정과리, 김성곤, 방민호, 유성호, 문혜원 등이 수상을 했다. 이들은 한국 비평문학계에 내로라하는 평자들로 면모만 봐도 김환태평론문학상의 위상이 어떠한지 가늠할 수 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