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안반데기 - 정선 시인
  전체메뉴
[수필의 향기] 안반데기 - 정선 시인
2025년 09월 01일(월) 00:00
시난고난한 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풋내가 그립다. 고독할 자신이 있거든, 가난할 자신이 있거든, 유명하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 시인이 되라. 세상은 뒤숭숭했고 경쟁에서 지친 나는 겉돌았고 간간이 불안했다.

나의 두문동, 구름 위의 땅, 한여름 안반데기. 내 눈은 맨 먼저 새하얀 뭉게구름을 품고 푸른 배추밭에 앉고 커다란 풍력기에 가닿는다. 마을 이름은 떡을 칠 때 사용하는 넓은 나무판인 ‘안반’과 평평한 땅을 의미하는 ‘데기’가 합쳐진 강릉 사투리다. 널따랗고 움푹한 언덕배기는 황량하지 않고 안온하다. 깔때기 모양의 언덕 아래 집 몇 채가 단출한 식구 같다. 나도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는 느낌이다. 삿된 것들로부터, 훼방 부리는 것들로부터.

풍력기의 위용 아래 배추밭이 펼쳐진다. 산중에 이렇게 싱싱한 땅이 있는가. 이렇게 이쁜 초록꽃이 어디 있을까. 줄 맞춘 배추 포기들이 노란 속을 채우느라 영차영차 땀을 흘리는 듯하다. 푸르디푸른 생명력 앞에서 식물성 피가 돌고 돈다. 몸이 살아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배추가 작년 같지 않다. 수확한 밭에는 배추가 통째로 버려지고 어느 밭은 절반 가까이 누런빛으로 변했다. 겉잎은 멀쩡한데 고온으로 배추 포기 한가운데가 썩은 것이다. 이상기온은 여지없이 고랭지 배추밭을 공격했다.

애초에 저 초록은 화전민의 눈물과 땀이다. 배추 한 포기 안에는 농부의 조바심과 불면과 눈물도 들어 있지만 투박하나 따스한 손길과 다정한 호흡과 순박한 웃음이 쟁여 있다. 제빛을 잃은 배추밭이 안타까웠다. 나머지 배추들의 운명은 하늘에 달렸다. 배추 포기들을 쓰다듬는다. 제발 적당한 바람과 햇볕과 비의 주도 아래 나의 두문동에 수확의 기쁨이 넘쳐나기를.

오월 안반데기는 온통 붉은 황톳빛이다. 비어 있으나 숨 쉬는 이 땅이 좋다. 고향의 그리운 빛깔이다. 엄마도 작은아버지도 대밭과 고구마밭마저 스러진 고향은 쓸쓸하다. 배추 수확이 끝난 11월에는 짙은 황톳빛으로 차분하다. 땅은 돌아올 봄을 기약하며 긴 잠잘 준비를 한다. 황톳물이 들도록 맨몸으로 뒹굴고 싶다. 끌텅을 찾아가 보면 나는 촌놈인 게다. 내 피는 아마도 초록이거나 황토색일 듯싶다.

초록 바람과 짠내 바람 사이에 선다. 겹겹 산들을 멍하니 바라보니 골짜기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우리는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배신과 신의 사이, 거짓말과 참말 사이, 인내와 성급 사이, 욕망과 청정 사이. 담대함과 두려움, 무던함과 예민함, 천천히와 빨리빨리, ……오늘과 내일, 1분과 1초, ……그 ‘사이’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사이’에서 부딪히고 부서지며 오뚝 일어서려고 부단히 기를 썼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 관계는 버석거리고 간격이 생겼다. 뒤돌아보면 헤아림이 부족했다. 깊게 헤아린다는 말, 거기에는 포용과 관용과 따스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

형상을 바꾸며 휘게의 바람이 분다. 안개가 밀리고 구름도 몸을 바꾼다. 바람과 팔짱을 끼고 배추밭 사잇길을 걷는다. 바람이 내게 속삭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비로소 빈둥거릴 자유가 생겨난다. 어떤 책임과 역할로부터 벗어난다. 눈치껏 불안도 슬그머니 도망간다.

나는 바람을 섬기는 사람. 이곳에서 전령사는 바람이다. 안반데기에서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바람 속을 걷는다. 바람은 세상의 소문과 동향과 시조(時兆)를 철철마다 물어다 준다. 때로 바람은 고랑 고랑마다 불온한 소식을 숨겨 둔다. 신간 복잡한 일들이 저절로 삭혀지도록 말이다. 지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저 바람과 안개로 지우자. 은밀히 묻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황토에 묻어 두자. 그리고 바람이 잠든 저 고요를 죽비라고 이름 붙이자.

소중한 것은 부서질까 봐 때 탈까 봐 숨겨 두는 것. 내 몸을 비우고 설경과 일출과 일몰을, 밤하늘 은하수와 별빛과 달빛을 아껴 둔다. 한 며칠 자발적 고립이 간절할 때 바람을 만나러 갈 것이다. 사람의 발자국조차 오물이 되는 요즈음, 나만의 성소가 더럽혀지지 않기를 두 손 모은다.

고독이 포동포동 살지는 곳, 안반데기는 내게 ‘무우수(無憂樹)’다. 배추 풋내와 청량한 바람과 티끌 하나 없는 햇볕은 해독제다. 싱싱한 위로다. 나는 안반데기에 또 한 그루의 그리움을 심어 놓는다.

핫이슈

  • Copyright 2009.
  • 제호 : 광주일보
  • 등록번호 : 광주 가-00001 | 등록일자 : 1989년 11월 29일 | 발행·편집·인쇄인 : 김여송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4(금남로 3가 9-2)
  • TEL : 062)222-8111 (代) | 청소년보호책임자 : 채희종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주일보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