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구름으로부터 - 김향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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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구름으로부터 - 김향남 수필가
2025년 09월 08일(월) 00:00
요즘 나는 한 해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네. 거센 폭우를 쏟아내며 온 세상을 흔들 때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이토록 맑고 투명한 하늘이 펼쳐지네. 덕분에 나는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순결한 흰 구름을 뭉게뭉게 피워 올리고 있지. 사람들도 모처럼 환한 얼굴이네. 고개를 들어 찰칵찰칵 나를 찍는 이들도 있고, 한참을 멈춰 오래 바라보는 눈길도 있군. 나도 왠지 으쓱해진다네.

아시다시피 나는 구름이라 불리네. 공중에 떠다니는 수증기 덩어리들이지. 하지만 사람들의 눈 속에서 나는 꽃이 되기도 하고, 용이 되기도 하며, 사라져가는 꿈의 자취가 되기도 한다네. 그들은 내게 새털구름이니 양떼구름, 먹구름이니 비구름 들이라 이름을 붙이더군. 붓을 들어 화폭에 담고, 시를 읊조리며, 내 침묵을 노래하기도 하더군. 아마 나는 그대들 상상의 거울이자 내면의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네.

나는 순간마다 흩어지고 사라지지만 그 사라짐이 곧 나의 지속이네. 한가지로 머물러 있지 않기에 오히려 끊임없이 존재하는 셈이지. 어제의 나는 이미 없지만, 오늘의 내가 하늘을 메우고, 내일의 나는 또 다른 형상으로 찾아올 것이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덧없음을 느끼지만, 사실 나는 윤회의 증거, 순환의 표징이라네. 이 점에서 나는 무상이면서도 동시에 영원인 존재라네.

사람들은 나를 ‘변화의 화신’이라 칭하더군.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모양을 바꾸고, 존재의 결을 달리하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가 금세 짙은 먹구름으로 변하고, 세찬 비를 쏟아낸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흩어지네. 얼음으로, 빗방울로, 안개로 몸을 바꾸는 게 내 일상이니 말일세.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나에게 자유와 방랑, 덧없음과 초월의 이미지를 겹쳐 보기도 하고, 때론 두려움과 불안을 투영하기도 하지. 더러는 간사하다거나 변덕스럽다고 여기기도 하더군. 하지만 그것은 오해라고 생각하네. 나는 언제나 세상의 흐름과 조화 속에 있으니 말일세.

나는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네. 내 뒤에는 늘 바람과 대기와 태양이 있다네. 나는 언제나 그들과 더불어 존재하지. 내가 변신에 능한 건 다 이유가 있네. 절대 간사해서도 변덕스러워서도 아니네. 내 형상이 시시각각 바뀌는 건 오히려 정직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네. 주변의 신호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모습을 빚어내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라네.

그런데 저기 저 사람, 아직도 꼼짝하지 않는군. 골똘한 눈빛에, 어쩌면 울먹이는 것도 같네. 공연히 마음이 쓰여 한참을 지켜보고 있다네. 마음 같아선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지만, 나는 조용히 공중을 맴돌 뿐이네. 나는 무형상의 형상, 무채색의 색채, 무소유의 소유, 없음의 있음, 있음의 없음…, 붙잡을 수 없는 허공의 그림자가 아니겠는가.

하여간 뭐, 어떻든 내 그림자에 이름을 붙여주는 건 참 멋지더군. 상상하고 해석하고 명명해준 덕분에 나는 수많은 별칭을 얻게 되었지. 인간사의 다양한 비유와 상징이 된 것도 감사한 일이네. 무엇보다 우리의 우정에 경의를 표하네. 나는 항상 그대들의 머리맡을 지켜왔고, 그대들 역시 늘 나를 바라봐왔지 않은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사유의 길을 열고, 깨달음을 전하며, 삶의 의미를 찾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우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뚱맞게 들릴지 몰라도 분명히 나는 그렇다고 느끼네. 그 우정에 힘입어 기꺼이 내 마음을 털어놓는 거라네. 저기 저 사람, 아직도 생각에 잠긴 저이에게도 꼭 전해지기를 바라네.

그대들이 나를 통해 날씨를 점치거나 앞날을 궁리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네. 나의 변신은 삶도 그렇게 유연하게 흘러갈 수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지. 내가 바람과 태양에 나를 조응하듯, 그대도 세상 건너는 지혜를 배우면 좋겠네. 보이지 않는 힘에 귀 기울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형상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나와 그대가 함께 짊어진 숙명이 아니겠는가. 오래 바라보는 것은 결국 그대 내면의 진실한 풍경을 읽어내는 일이 될 걸세. 사라지는 나를 보며 삶의 찰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듯이.

그러니 앞으로도 나를 오래도록 바라봐주게. 내 존재가 그대에게 작은 위로와 통찰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네. 나는 떠나가지만, 다시 흘러와 그대 곁에 머무를 것이니.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기억하길 바라네. 늘 안녕하시게. 구름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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