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산호의 꿈 - 이중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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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산호의 꿈 - 이중섭 소설가
2025년 09월 22일(월) 00:20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다. 이제는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 가지 못한다. 부모님이 없는 고향은 그리움으로만 쌓인다. 고향 하면 먼저 푸른 유자나무에 노란 유자가 생각나지만, 그보다 갯벌 냄새의 바닷바람이 먼저 달려든다. 고향 풍남 앞 바다를 생각하면 늘 어릴 적 한 장면이 떠오른다. 중학 시절 아침 교실이었다. 바닷가 출신인 S가 가방에서 어른들 긴 손가락 같은 주황색 물체를 꺼냈다.

“산호야. 아침에 아버지가 바다에서 건진 거야.”

우리 동네는 바다 농사를 짓지 않기에 주황색 실물 산호는 처음 보았다. 산호는 원래 갯벌 색으로 알았다. 석회질의 나뭇가지처럼 생긴 산호만 본 나에게 뭔가 살아 있는 듯한 치자색 산호는 강렬하고 신비했다.

중학생 1학기 첫 번째 달이고 그와는 초등학교가 달랐기에 선뜻 달라고 말하기가 곤란했다. 바닷가 출신 아이들이 대부분 바닷바람에 까맣게 탓 듯이 S의 얼굴도 그랬다. 그와 좀 더 가까워진 것은 2학년 때 학습 부장을 하면서였다. 그 시절 학습 부장은 방과 후에 다음 날 아침 자습 시간에 공부할 문제를 칠판에 미리 필사해 놓았다. 그는 칠판 글씨체가 좋아 가끔 선생들이 누가 썼느냐고 묻고는 했다.

졸업 후 S를 다시 만난 것은 거의 사십여 년이 흐른 어느 여름이었다. 어머니 기일이라 고향에 내려갔다가 읍내 터미널 앞 그의 카페에 들렀다. 술 한잔할 겸 서대회를 하는 식당을 찾았는데 늦은 밤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다시 그의 카페에 그의 아내도 함께 자리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접한다고 좋은 와인을 내왔다. 이제까지 마셔본 와인과 달랐다. 왠지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조금씩 포도주에 취하자, 그때 그 중학 시절의 이야기가 나왔다.

“너는 어릴 때 우리 바닷가 국민학교 출신들보다 엄청 얼굴이 하얬어. 너희 중앙 출신들은 키도 크고 멋있게 생겨서 우리 바닷가 애들이 늘 주눅 들었지.”

먼저 S가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같은 촌놈 사이에서도 이렇게 생각이 달랐다. 물론 우리 국민학교가 면 소재지에 있었지만 늘 배가 고팠고 해진 옷을 입어 다들 구질구질한 촌놈이긴 마찬가지였다.

“S! 너는 중학교 다닐 때 키가 엄청 작았는데 웅변을 아주 잘했지.”

웅변 이야기에 그의 아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양손을 태권도 하듯이 요리조리 움직이면서 열변을 토했잖아.“

그가 갑자기 어린 시절이 생각난 듯이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그래, 맞아. 그때 웅변 겁나게 자주 했지. 자네는 별걸 다 기억해.“

그 순간에 갑자기 아주 이상한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들이 웅변할 때 사실 너무 우스웠다. 저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저토록 진지하게 하는 꼬맹이들의 모습에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 이런 묘한 생각이 그때, 그러니까 진짜로 그 웅변대회 현장에서 했는지, 아니면 와인 마시는 그 카페에서 S와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아니면 지금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김일성한테 엄청 미안하네. 뭘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사정없이 욕을 했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처음에는 목소리를 깔고 근엄하면서 진지하다가 갈수록 웅장하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마지막에는 있는 힘껏 악을 내지르며 박수를 유도했었다. 하여튼 그 여름밤 S를 만나 그런 추억을 나누었던 장면이 생각났다.

나이가 들어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그립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아닌가 싶다. 갈맷빛 천등산에 산삼이 있고, 그 너머 바닷속에는 산호초에 둘러싸인 용궁이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그런 상상을 헛된 꿈이라 생각하고, 산호가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식물이 아니고 먹이로 에너지를 얻는 동물인 것도 알고, 추석이 돌아와도 고향에 쉽게 가지 못하고 그리워만 하는 죽은 석회질의 산호 같은 어른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랬다. 그 시절에는 상상의 꿈을 꾸고 그리움을 알고 나 자신 세상에 희망이 될 거라 믿었다. 그런 마음이 어른이 되어서도 항상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해마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그런 둥근 마음이 보름달 속에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흑백의 영화로 바뀌면서 밤 내내 고향과 도시를 잇는 교감(交感)의 다리로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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