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쓸개는 있고, 쓸개가 없다 - 정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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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쓸개는 있고, 쓸개가 없다 - 정선 시인
2025년 09월 29일(월) 00:20
있으나 마나, 없어도 상관없으니 잘라 버리겠다고? 그것은 모르는 소리. 누구든 무엇이든 태어난 대로 제 깜냥이 있고 제 역할이 있지. 굳센 결기는 나의 특장이지. 작다고 얕보지 마. 사람들 입에 회자될 만큼 근본이 있다고! 독소가 몸을 야금야금 잠식할 때쯤 깨달을 거야. 있을 때는 고마움을 모르는 법.

쓸개의 당찬 노래를 듣는다. 쓸개(膽囊·담낭)는 간 밑에 붙어 있는 7~8센티 길이의 주머니다. 쓸개는 간에서 분비하는 담즙을 저장하고 지방을 유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쓸개를 떼어내면 기름진 음식을 먹었을 때 일시적으로 소화 능력에 문제가 생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된다.

나는 쓸개가 간과 아울러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기라고 생각했다. 근간이 되는 상량처럼, 태백산맥처럼, 척추처럼. 그런데 쓸개가 고작 담즙을 저장하는 간의 보조주머니라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터지면 한순간에 ‘아주 몹쓸 놈’이 된다. 옆 장기에까지 독을 퍼뜨리니 차라리 깨끗이 제거하는 게 더 예후가 좋다고 한다.

예로부터 쓸개는 융숭하게 대접을 받았다. 선조들은 쓸개를 용기와 올곧음의 상징으로 여겼고, 귀한 약재로 쓰기도 했다. 쓸개 담(膽)자에는 굽힐 줄 모르는 기백이 숨 쉬고 보이지 않는 호연지기가 서려 있다. 담(膽)자가 들어간 말 가운데 내가 애정하는 말은 ‘담대(膽大)함’이다. 두려움 없이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용기. 무슨 일을 추진하려면 담력이 필요하다. 위대한 사람들은 올곧고 담대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은 불편한 섶에 몸을 눕히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거나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의미한다. 쓸개를 핥는다는 것은 극한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나아가 한계를 넘어서는 숭고한 의식이다.

떼려야 뗄 수 없이 친밀한 쓸개와 간. 간담상조(肝膽相照)라는 말은 간과 쓸개를 서로에게 내보일 정도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친하게 사귄다는 뜻이다. ‘간도 쓸개도 빼준다.’라는 말 또한 내게 매우 귀중한 것을 소중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내어준다는 의미이다.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는 간과 쓸개를 바치겠다고 했다.

쓸개는 그만큼 중요했기에 용기 없고 제 역할을 못 한 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을 뭉뚱그려 ‘쓸개 빠진 놈=속창아리 없는 놈’이라고 불렀다.

앞뒤 언행일치가 안 되고 표리부동한 놈, 옳지 않은 일을 보고도 제 이익을 챙기려고 아부 떠는 놈, 부모에게 제 몫의 재산을 미리 주라는 영재 놈, 시 전체 21행 중 14행을 표절하여 신춘문예 당선한 놈, “인생은 한방이야.” 좋은 머리를 진취적인 데 쓰지 않고 사행심과 삿된 생각으로 가득 찬 놈. 할부로 여자 친구 명품 가방 사 주고 헤어질 때 기어이 돌려주라는, 폼생폼사 월세 살면서 벤츠 모는, 제 땀은 흘리지 않고 여자들의 돈으로 잡지 권력 누리는, 처자식은 굶는데 남일에는 앞장서며 호인 소리 듣는, 부처의 길을 따르겠다고 머리 깎더니 속세에 절어 사는, ……놈 놈 놈들.

어떤 대상을 두고 단순히 ‘쓸모’만 생각하면 연민이 생기고 슬퍼진다. 중학교 1학년 때 납부금을 못 내서 2학년으로 진급을 못 할 뻔했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은 아직도 앙가슴에 흉터로 도드라져 있다. “너는 책임감도 없고, 너만 아니면, 너 때문에 우리 반이 꼴찌야.”

가난이 내 잘못인가 몹시 서러웠다. 점점 주눅이 들고 조회와 종례 시간이 두려웠다. 따가운 눈총들이 가시로 내 온몸에 박혀 나는 미운 고슴도치 한 마리가 되었다. 그때 나는 독을 퍼뜨려 다른 장기에까지 상처를 주는 쓸개 같은 존재였던 건 아닐까.

간 밑에 깊숙이 자리 잡은 나지막한 배경, 그 배경으로서 쓸개는 오롯한 쓸개다. 특별히 큰 역할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자체만으로 든든하고 힘이 되는 그런 존재가 있다. 조연과 주연, 쓸개와 간, 둘의 관계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서로 받쳐 주고 함께할 때 빛난다.

쓸개의 겸허한 마음을 헤아려 본다. 시각을 달리하면 보잘것없는 쓸개에도 아우라가 생긴다. 쓸개는 ‘있어야 더 좋을’ 곧 ‘있음으로 주위를 더 빛나게 하는’ 은근한 존재다. 쓸개여, 움츠리지 말고 위풍당당하라. 쓴맛의 한방을 보여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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