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감자를 바라보는 자세 - 정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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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감자를 바라보는 자세 - 정선 시인
2025년 11월 24일(월) 00:20
저녁 7시, 벽시계 옆에는 액자가 걸려 있다. 창문 밖은 깜깜하고 천장에는 수저통과 끈 달린 가방이 매달려 있다. 서까래가 보이는 지붕 아래 하얀 면보가 깔린 사각 식탁에서 노부인과 젊은 부부, 등을 보인 소녀가 식사를 하고 있다. 감자에서는 김이 하얗게 피어오른다. 젊은 남자의 강파른 광대뼈, 포크를 든 그 부부의 불거진 손마디와 손등, 식은 차를 따르는 노부인 이마의 깊게 팬 골, 찻잔 든 노인의 굴곡진 얼굴……. 젊은 여자의 눈망울은 또렷하고 웃음기는 없다. 식탁 한가운데 램프 불이 빛난다.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하루의 수고를 털어 내고 땀의 결실로 얻은 뜨끈뜨끈한 감자를 먹는 단출한 저녁, 고흐는 노동 후의 소박한 식사를 정직하고 경건하게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암스테르담 고흐뮤지엄에 소장된 이 그림에는 사람들의 눈길이 오래 머물렀고 농부의 거친 삶과 노동의 신성함에 숙연해졌다. 고흐는 농부의 삶과 뿌리를 중요시했다. 거칠고 투박한 삶을 보여 주기 위해 농부들의 손가락과 얼굴을 수십 번씩 그렸고, 2년에 걸쳐 보고 느낀 것을 꾸밈없고 진실하게 표현했다. 농부들의 피부색은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먼지투성이의 감자 색’으로, 얼굴의 윤곽은 검게 칠해서 강퍅한 삶과 노동의 정직함이 극대화된다. 귀한 소출인 감자를 매개로 둘러앉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단함을 잊는 소중한 시간. 램프 불은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고, 그 빛에 고흐가 말하는 본질이 응축되어 있는 듯하다.

정직한 손과 정직한 얼굴, 그로 얻은 정직한 감자, 그러나 감자에서는 가난의 냄새가 난다. 가난의 모습은 왜 그리 닮았는지 마음 한 켠이 먹먹하고 도시 생활의 궁핍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농부와 감자가 지닌 순수한 흙냄새가 아닌 눅눅한 곰팡이와 묵은때의 퀴퀴한 냄새가 코에 훅 끼친다.

나는 이 그림에 별빛이 반짝이는 창문을 그리고 어른들의 눈과 입가에 웃음을 담으련다. 램프 불을 주황빛으로 환하게 칠하고 안온하도록 무명천으로 리본 커튼을 달아 주고 싶다. 모락모락 향긋한 커피도 대접하고 싶다.

내게 감자는 차가운 기억이다. 감자밭 흙은 거무스름했고 줄기를 뽑으면 주렁주렁 매달린 노란 감자가 무지 오졌다. 그런데 감자는 여름이 지나면 싹이 나고 생으로 못 먹고 달지도 않았다. 식은 감자는 맛이 아리고 냄새도 이상했고, 곯으면 구린 냄새가 났다. 게다가 친구들은 얼굴이 까만 나를 ‘탄 북감자’라고 놀렸다.

감자는 곧 숭고한 생명이다. 동서양의 추운 곳에서도 환영받는 식량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직한 땀을 배신하기도 한다. 영국의 식민지 아일랜드는 1845년부터 7년간 역병이 감자를 덮쳐 200만 명이 사망하고 굶주림을 못 견딘 많은 사람이 해외로 이주했다. 리피 강변에는 기근선 하나가 정박되어 있고, 감자 대기근을 겪은 사람들의 추모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은 맨발에 누더기를 걸치고 깡마른 몸에 구부정한 자세다. 부식된 동상이 굶주림의 비참함과 처절함을 더한다. 다섯 손가락으로 보퉁이를 움켜쥐고 초점 잃은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여인, 반쯤 벌린 입에서는 금방 원망하는 소리가 구슬프게 흘러나올 것만 같다. 굶어 죽은 아이를 어깨에 둘러멘 아버지, 눈물조차 말랐을 그 동상을 오래 바라보았다.

고구마는 따스한 기억을 지녔다. 나는 남녘 고향의 초가집 아래 ‘고구마 먹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 피부색은 햇볕에 그을린 살색으로 칠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고 명랑하게.

낮 12시 20분, 주걱 같은 시계추가 똑딱똑딱 바쁘다. 시렁 위에는 빛바랜 함 두 개와 빨간색 목화 솜이불 한 채, 벽에는 대나무 옷걸이에 검정 두루마기가 걸쳐 있다. 윗목 한쪽 구석에는 대나무로 엮은 발 안에 빨갛고 잘생긴 고구마가 한가득 쌓여 있다. 작은아버지는 인두로 화롯불을 다지며 단도리를 한다. 나와 사촌형제들은 둥근 소반에 둘러앉아 콧물을 훌쩍이며 고구마를 먹는다. 자치기를 한 부르튼 깜장 손으로 뜨거운 김을 후후 식히며. 상기되어 깔깔거리다 목이 메이면 쪽진 머리의 작은어머니는 “아야, 체할라.” 하시며 살얼음이 뜬 동치미 국물을 먹여 주고 무를 손에 들려 준다. 오도독, 무가 씹히는 소리에 겨울 오후가 맛나고 즐거워진다.

푸근하고 정겨운 성찬(聖餐)이다. ‘고구마 먹는 사람들’을 그리는 마음이 가벼우면서도 풍요로운 것은 왜일까. 함박눈이 소복이 쌓인 한낮, 단발머리 어린 아이가 토방에 걸터앉아 속살이 노오란 고구마를 베어 물며 달콤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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