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전주에서 미리 만나는 봄, 풍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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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전주에서 미리 만나는 봄, 풍년화
2025년 03월 05일(수) 21:30
봄이 부쩍 가까워졌다. 남쪽 제주에서부터 매화와 수선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해 산수유의 노란 꽃봉오리도 서서히 벌어지고 있다. 매실나무와 산수유는 가까이에서 우리에게 봄을 알리는 식물이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이른 계절 우리에게 봄을 예고하는 식물이 있으니, 바로 풍년화다. 풍년화는 줄곧 봄의 전령,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생물로 여겨져 왔다.

지난주 도쿄대학교 고이시카와식물원에 다녀왔다. 겨울이 완전히 다 가시지는 않은 날씨 탓에 식물원에 들어섰을 때 예년만큼 봄의 기운이 마구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군데군데 핀 철쭉류와 풍년화가 희미하게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고이시카와식물원에는 거대한 풍년화 두 그루가 있다. 한 그루는 종소명 자포니카로 우리가 흔히 풍년화라고 부르는 종이고, 또 한 그루는 일본의 식물학자인 마키노 도미타로가 명명한 비추엔시스풍년화다.

자세히 보니 두 종은 꽃의 형태도 달랐다. 비추엔시스풍년화는 풍년화보다 꽃잎이 훨씬 긴 데다 가늘며, 풍년화의 꽃받침색은 녹색이지만 비추엔시스풍년화의 꽃받침은 자주색이다. 물론 멀리에서 보면 둘은 한 종처럼 보일 정도로 닮았다. 지금 풍년화 꽃이 한창 만개한 터라 식물원에 온 사람들은 모두 이들 곁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풍년화는 풍년화라는 종을 가리키는 동시에 조록나무과 풍년화속의 식물을 총칭한다. 풍년화는 일본 원산으로 1930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어 조경수로서 전국에 심어졌다. 이들 이름은 가지에 꽃이 가득 피거나 이른 봄 일찍 꽃이 피면 그해 풍년이 온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속명 하마멜리스(Hamamelis)는 비슷하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하모스(hamos)’와 서양모과를 뜻하는 ‘메스필러스(Mespilus)’의 합성어다.

풍년화는 산수유와 매실나무처럼 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꽃이 가지에 가득 달려 만발한다 하여 일본에서는 이들을 만작이라고도 부른다. 꽃은 잎겨드랑이에서 한 송이씩 달리거나 여러 송이가 모여 달린다.

나는 풍년화가 피는 계절이면 자주 전주로 향했다. 전주수목원(한국도로공사 전주수목원)에는 몇 그루의 풍년화가 있다. 이곳의 풍년화는 매년 내가 사는 경기도의 것보다 꽃이 한 달 가량 빨리 피기 때문에, 이곳에서 나는 봄을 한 달 더 빨리 만날 수 있다. 2월 말에서 3월 초 즈음 전주수목원 내에서 사람들로 가장 붐비는 곳은 풍년화와 납매 주변이다.

전주수목원의 풍년화는 한 종이 아니다. 중국풍년화와 버나리스풍년화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풍년화속 식물은 품종까지 더하면 수십 종이 된다. 대표종인 풍년화, 미국 원산의 버지니아풍년화 그리고 모리스풍년화와 중국풍년화 등이 있다. 국가표준식물 목록상에서는 모리스풍년화를 중국풍년화로 부르길 추천한다.

풍년화는 관상을 위한 조경 식물 뿐만 아니라 실용성 면에서 다각도로 유용한 식물이다. 예로부터 나무껍질은 바구니를 만들거나 물건을 묶는 끈으로 이용되었고, 버지니아 풍년화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약으로 쓰였다. 줄기를 삶거나 쪄 진액을 낸 후 근육통이 심한 곳, 상처 난 곳, 벌레 물린 부위에 발랐으며 폐렴, 종양을 치료할 때도 이용했다고 한다. 풍년화의 잎을 끓여 차로 만들고 씨앗도 먹을 수 있다.

나는 아직 풍년화를 그린 적이 없다. 어느 기관에서도 내게 풍년화를 그려달라 제안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풍년화 그림은 있다. 이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인 1881년부터 1884년 사이 일본에서 기록되었다. 도쿄대학교 고이시카와식물원에서 초목도설을 만들기 위해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 그림은 초목도설에 삽입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후에 우연히 공개되어 고이시카와식물원의 상품 디자인에 활용되고 있다.

나에게도 그런 그림이 있다. 나만이 아는 그림. 다 그리고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공개를 하지 않거나, 책에 삽입하기를 거부하거나, 시간이 지나 나조차 잊어버린 서랍 속 그림들. 하지만 결국 언젠간 공개하게 되지 않을까. 나의 기록은 나보다 수명이 길다. 나는 이 땅에 영원히 살 수 없고, 버리거나 불태우지 않는 이상 내가 만든 기록을 영원히 내 마음대로 할 순 없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 풍년화 그림의 운명처럼 말이다.

<식물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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