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에서 전해 온 슬픈 소식 - 최현열 광주 온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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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목사로부터 매우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두 분의 선교사님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장인과 사위 사이인지라 더욱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김창열 선교사님은 “전 국토가 불모지나 다름없는 그 땅을 보고 농촌을 살리고 그 나라 국민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말하며 그곳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나타냈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에서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평안한 삶을 버리고 장인 목사님의 그 뜻을 받들어 어디든 함께 다니며 노력하던 사위가 바로 이리문 선교사이다. 2월 21일 밤, 떼강도 7명이 교회 문을 부수고 들어와 엽총과 흉기로 피습을 하고 현지 사역비용 3백만 아리(한화 90만원)를 갈취하고 달아났다. 사건이 발생한 후 두 선교사는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한다.
두 명의 선교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순서노회에서 파송 받았다. 김 선교사는 은퇴 후 아프리카 침술 봉사와 농업선교를 하기 위해 2년 전 마다가스카르로 떠났고 사위 이 선교사는 지난해 합류했다. 김 선교사는 교회 텃밭을 주민들에게 빌려주고 그곳에 바닐라 나무 등 유실수 묘목을 심는 사역을 펼쳤다. 주민들은 나무 열매로 발생한 수입을 얻어 삶을 꾸렸다. 이 선교사는 마다가스카르 농촌을 살린다는 비전으로 현지 선교단체, 중개자와 소통하며 농촌개발 사역을 기획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또 우물 파기와 교회 개척 사역을 통해 현지에 복음을 전했다.
광주에서 개신교의 역사는 1904년 유진 벨, 오웬 선교사 등이 양림동에 자리 잡으면서 시작됐다. 미국 남장로교가 당초 선교 기지를 삼으려 했던 곳은 광주가 아닌 나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주는 유생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광주로 옮겨온 선교사들이 자리 잡은 곳이 양림동이었다. 시 외곽이었던 양림동 언덕은 고려시대부터 시신을 버리던 풍장(風葬) 터였다고 한다. 버려진 땅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땅이었던 셈이다. 선교사들은 이런 죽음의 땅에 선교 기지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고 병원과 학교를 설립해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사역을 시작했다. 1904년 12월 25일 성탄절, 이곳 유진 벨의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광주·전남 지역 선교사역이 시작됐다.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1880~1934)은 ‘한국 간호학계의 어머니’다. 1912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온 그는 광주 제중병원 간호원장으로 일하며 고아와 한센인을 돌봤는데, 양딸로 거둔 고아가 13명에 이르렀다. 1934년 그가 별세했을 때 수중엔 현금 7전,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다고 한다. 20여명의 선교사가 잠들어 있는 양림동 선교사 묘원에는 ‘영혼까지 웃게 하라’는 글귀가 새겨진 묘비가 있다. 그리고 조선에서 선교사들의 목표는 ‘조선의 짐을 들어주고, 조선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라고 뚜렷이 새겨져 있다.
고린도후서 6장 4절에서 10절까지 말씀에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던 두 분의 순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며 슬픔이지만 그들의 사랑의 수고는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 그들의 뒤를 이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 본토인들이 자력갱생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 나라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며 열매 맺기까지 그리고 후손 대대로 이들의 죽음이 기억되고 또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두 명의 선교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순서노회에서 파송 받았다. 김 선교사는 은퇴 후 아프리카 침술 봉사와 농업선교를 하기 위해 2년 전 마다가스카르로 떠났고 사위 이 선교사는 지난해 합류했다. 김 선교사는 교회 텃밭을 주민들에게 빌려주고 그곳에 바닐라 나무 등 유실수 묘목을 심는 사역을 펼쳤다. 주민들은 나무 열매로 발생한 수입을 얻어 삶을 꾸렸다. 이 선교사는 마다가스카르 농촌을 살린다는 비전으로 현지 선교단체, 중개자와 소통하며 농촌개발 사역을 기획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또 우물 파기와 교회 개척 사역을 통해 현지에 복음을 전했다.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1880~1934)은 ‘한국 간호학계의 어머니’다. 1912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온 그는 광주 제중병원 간호원장으로 일하며 고아와 한센인을 돌봤는데, 양딸로 거둔 고아가 13명에 이르렀다. 1934년 그가 별세했을 때 수중엔 현금 7전,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다고 한다. 20여명의 선교사가 잠들어 있는 양림동 선교사 묘원에는 ‘영혼까지 웃게 하라’는 글귀가 새겨진 묘비가 있다. 그리고 조선에서 선교사들의 목표는 ‘조선의 짐을 들어주고, 조선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라고 뚜렷이 새겨져 있다.
고린도후서 6장 4절에서 10절까지 말씀에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던 두 분의 순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며 슬픔이지만 그들의 사랑의 수고는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 그들의 뒤를 이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 본토인들이 자력갱생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 나라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며 열매 맺기까지 그리고 후손 대대로 이들의 죽음이 기억되고 또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