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혜의 호남극장 영화사] 촤르륵~ 스크린에 영상 투영 … 낡은 필름·잦은 고장과 사투
<8> 영화상영 현장의 테크놀로지, 영사기 -영사기사의 애환
기술 국산화 이전 美·日서 중고 들여와
필름 손상·영사기 부품 고장 비일비재
청계천 일대·해외 지인 통해 부품 조달
영사기사, 시험 통한 자격 면허제 운영
상영 여부, 상·하 편집 등 ‘현장 절대 권력’
디지털로 매체 전환되며 역사 속으로
기술 국산화 이전 美·日서 중고 들여와
필름 손상·영사기 부품 고장 비일비재
청계천 일대·해외 지인 통해 부품 조달
영사기사, 시험 통한 자격 면허제 운영
상영 여부, 상·하 편집 등 ‘현장 절대 권력’
디지털로 매체 전환되며 역사 속으로
![]() 디지털 파일을 열어서 영화를 상영하는 현재 ‘영사기사 무용론’까지 언급되는 상황이지만, 영사기사는 한때 상영 현장의 절대 권력자였다. 광주극장에 전시된 영사기. |
내 지인 가운데 영상자료원에서 일하는 이가 있다. 지인의 아버지는 젊어서 몇 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 지인은 부친의 영화보다는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갔던 극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화면에 보이는 신기한 볼거리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좌석 뒤에서 ‘촤르르륵’하고 들렸던 소리를 또렷하게 기억하였다. 그녀의 객석이 영사실에 가까웠던 모양인데, 그 소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것만 같아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 소리는 그녀를 영상기록 문서 담당자(archivist)로 살게 한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영사기와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 아날로그 필름이 영사기를 타고 흐르며 내는 그 소리는 특정 연령대 이상의 관객만이 기억하는 소리일 것이다. 디지털 매체 환경에 둘러싸여 인터넷 기반 플랫폼을 통해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에겐 머나먼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영화는 최신의 기술을 망라한 근대 매체 예술이다. 전기의 도입으로 극장이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처럼 영사기가 있어야 필름을 ‘돌릴 수’ 있었다. 디지털 파일을 열어서 영화를 상영하는 현재 ‘영사기사 무용론’까지 언급되는 상황이지만, 영사기사는 한때 상영 현장의 절대 권력자였다.
영화를 상영하려면 자격증이 필요했다. 1962년 한국 최초의 영화법이 공포된 다음 해 공연법을 개정하면서 영사기사의 자격 면허 제도를 채택하였다. 1964년 3월에 와서야 제1회 영사기사 면허시험을 치렀는데, 서울에서만 365명이 응시했다. 이전부터 극장에서 일했던 기사들도 자격증이 있어야 일할 수 있었기에 예외를 두지 않고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면허증 없이도 영화를 상영할 수도 있었다. ‘영화 규격이 16mm 이하인 경우’ 영사기사 자격증 없이도 영사할 수 있다는 공연법 규정 때문이었다. 비도시 군읍 소재지까지 35mm 영사기로 영화를 상영하던 1960년대 중반까지도 시골 마을을 돌면서 가설극장을 차렸던 영세업자가 남아있었던 이유였다.
영사기사 자격증 정비는 실상 국민을 단속하기 위한 박정희 정권의 조치였다. 그가 집권과 함께 모든 극장에서 극영화를 상영할 때 ‘대한뉴스’와 ‘문화영화’ 상영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흑백 TV 보급으로 대중매체의 일상화가 일어나기 이전 ‘대한뉴스’는 세상사 변화의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는 주요 매체였다. 주로 대통령의 활동과 국가 정책을 전하고 홍보 및 선전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뉴스영화였다. 문화영화는 ‘사회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제 현상 가운데 교육과 문화적 효과를 묘사하고 설명’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였다. 반공 이념에 바탕을 둔 국민을 만들고, ‘조국 근대화’를 향한 산업화를 위해 한국의 전체 영토를 균질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영사기사의 자격부터 정비한 것이다.
영사기사의 자격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문제는 영사기 자체였다. 1970년대 기술 국산화 이전에 영사기는 해외에서 들어오는 신기술이었으며 게다가 고가의 물건이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중고 제품을 수리해서 극장에서 사용한 까닭에 고장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영사기의 노후와 함께 여러 극장에서 상영을 마친 필름 역시 낡은 경우가 많아서 영사기사는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영사기에 집중해야만 했다. 하지만 잦은 고장은 영사기사의 고민이었다.
1960년대 초반 인천시 신포동 18-2번지에 자리한 개봉관 ‘인천키네마’의 영사기사 J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영사기사는 객석에 앉아서 영화를 관람하는 ‘손님’보다 앞서 새로운 영화를 만나는 최초의 관객이었다. 상영 이전 필름의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에 따라 필름 일부를 삭제하여 편집하는 작업도 그의 일이었다. 따라서 J씨가 ‘상과 하 The Enemy Below’(딕 포웰, 1957)를 영사하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느꼈던 감정은 당대 상영 현장 기술자의 애환을 들려준다.
‘상과 하’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연합군의 구축함(驅逐艦)과 독일군의 잠수함(潛水艦)을 앞세운 해전을 다룬 작품이다. 구축함 함장의 미국 배우 로버트 미첨과 독일 유보트 잠수함 함장의 독일 배우 커드 위르겐 사이 긴박감 넘치는 연기 대결도 흥미롭지만, 각 함대장(艦隊將)이 두뇌 싸움을 치열하게 펼치며 어뢰와 폭뢰를 주고받는 장면은 관객의 몰입을 불러일으킨다. 1958년 아카데미 특수효과상 수상한 작품답게 스펙터클(spectacle)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J씨는 ‘상과 하’를 재미있게 관람하면서도 ‘우리나라는 저런 배를 언제 만드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에게 영화는 전쟁의 파괴력에 관한 생각보다는 선진 기술의 격전장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그것은 앞선 기술을 다룬 영화적 소재에 특수효과라는 영화적 장치에 대한 부러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영사기 고장 때문에 신포 사거리에 자리한 라디오 가게 기술자를 불러 수리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을까? 영사기사 J씨는 영사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열의를 다 보였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자연과학 기술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않던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서 공부하면서 영사기 사운드 증폭 기술을 비롯해 라디오와 TV 작동 원리까지 터득하였다. 전쟁영화가 추동한 과학기술에 대한 열망이 내셔널리즘과 만나면서 영사기사의 일상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외화를 통해 만난 서구 문화에 대한 감탄과 열등감(?)이 극장 밖 현실 즉, 1960년대 기술 후진국 한국 남성의 정체성 자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1960년대 상영 현장은 해외로부터 들여온 기술에 의지하여 운영되었다. 영사 관련 기계와 부품은 ’청계천‘으로 불리는 장사동 일대를 중심으로 전기제품을 취급한 곳에서 수급되었다. 해방과 함께 일본 군용 무선기와 부품이 등장하고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군 무선기기와 부품을 파는 노점상이 몰렸던 그곳은 미군 부대에서 “몰래 빼내온 물건도 꽤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 곳이었다. ‘청계천’ 이외에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을 통해 직접 영사 기계 관련 부품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1970~1980년대 초반까지 광주의 중앙극장에서 영화 배급업에 종사한 L씨의 구술 증언은 이를 알려준다.
친인척을 중심으로 운영된 중앙극장의 관주(館主)는 당대 호남 지역에서 유명한 흥행사 이월금이었다. 그녀는 구월영화사를 거쳐 대호영화사를 운영하면서 영화 판권을 다수 보유한 흥행업계의 거물이었다. ‘일산(日産)을 제일’로 쳤던 그때 그녀는 세운상가의 업자들로부터 영사기를 구매하였다. 그녀가 거래한 업자들은 일본에서 폐기된 영사기를 구매하여 국내에 들여온 다음 재조립하여 극장에 판매했었다.
청계천 일대에 자리한 세운상가 이외에 일본과 직접 거래하기도 하였다. 영사기 고장으로 부품이 필요한 경우 일본 오사카에서 거주하던 자신의 남동생에게 기계 종류와 일련번호를 알려주고 부품을 입수했다. 1970년대 무역상을 통해서 촬영기를 비롯한 기계들이 공식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기 이전까지 사적인 연결망을 통해서 기술을 유입하는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따라서 L씨의 구술은 기술 국산화 이전까지 지인 또는 비합법적인 통로를 거쳐 전파된 영화상영 현장의 기술 전파 사실을 알려준다.
인천의 J씨가 영사 기술을 독학하면서 과학기술의 내셔널리즘을 보여주었다면, 부여의 H씨 사례는 영화를 동원하여 국민을 만들기에 집중하던 시절 영사기의 위력 자체를 보여준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충남 논산군 논산읍 논산극장 선전부원으로 일하면서 영사기 작동 방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1950년대 중반 문화영화 제작팀을 따라서 충남 부여에 들렀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부여극장을 발견했고 창고에 있던 35mm 영사기를 수리해서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부여극장은 음향 지원이 불안정한 16mm 영사기를 사용한 순업(巡業) 일행의 영화를 간헐적으로 상영하던 곳이었다. H씨는 비록 100석의 소규모 극장이었지만 입석까지 포함하면 최대 3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그곳에서 매일 영화를 상영했다. 그는 지역민에게 상설 극장을 운영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여군수와 경찰서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인천의 J씨와 부여의 H씨 모두 지난날 영사기사의 애환을 상적으로 보여주었다.
위경혜--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발전신문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최신의 기술을 망라한 근대 매체 예술이다. 전기의 도입으로 극장이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처럼 영사기가 있어야 필름을 ‘돌릴 수’ 있었다. 디지털 파일을 열어서 영화를 상영하는 현재 ‘영사기사 무용론’까지 언급되는 상황이지만, 영사기사는 한때 상영 현장의 절대 권력자였다.
영사기사 자격증 정비는 실상 국민을 단속하기 위한 박정희 정권의 조치였다. 그가 집권과 함께 모든 극장에서 극영화를 상영할 때 ‘대한뉴스’와 ‘문화영화’ 상영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흑백 TV 보급으로 대중매체의 일상화가 일어나기 이전 ‘대한뉴스’는 세상사 변화의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는 주요 매체였다. 주로 대통령의 활동과 국가 정책을 전하고 홍보 및 선전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뉴스영화였다. 문화영화는 ‘사회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제 현상 가운데 교육과 문화적 효과를 묘사하고 설명’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였다. 반공 이념에 바탕을 둔 국민을 만들고, ‘조국 근대화’를 향한 산업화를 위해 한국의 전체 영토를 균질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영사기사의 자격부터 정비한 것이다.
![]()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에 전시된 16㎜ 영사기. <위경혜 제공> |
영사기사의 자격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문제는 영사기 자체였다. 1970년대 기술 국산화 이전에 영사기는 해외에서 들어오는 신기술이었으며 게다가 고가의 물건이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중고 제품을 수리해서 극장에서 사용한 까닭에 고장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영사기의 노후와 함께 여러 극장에서 상영을 마친 필름 역시 낡은 경우가 많아서 영사기사는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영사기에 집중해야만 했다. 하지만 잦은 고장은 영사기사의 고민이었다.
1960년대 초반 인천시 신포동 18-2번지에 자리한 개봉관 ‘인천키네마’의 영사기사 J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영사기사는 객석에 앉아서 영화를 관람하는 ‘손님’보다 앞서 새로운 영화를 만나는 최초의 관객이었다. 상영 이전 필름의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에 따라 필름 일부를 삭제하여 편집하는 작업도 그의 일이었다. 따라서 J씨가 ‘상과 하 The Enemy Below’(딕 포웰, 1957)를 영사하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느꼈던 감정은 당대 상영 현장 기술자의 애환을 들려준다.
![]()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에 전시된 16㎜ 영사기. |
‘상과 하’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연합군의 구축함(驅逐艦)과 독일군의 잠수함(潛水艦)을 앞세운 해전을 다룬 작품이다. 구축함 함장의 미국 배우 로버트 미첨과 독일 유보트 잠수함 함장의 독일 배우 커드 위르겐 사이 긴박감 넘치는 연기 대결도 흥미롭지만, 각 함대장(艦隊將)이 두뇌 싸움을 치열하게 펼치며 어뢰와 폭뢰를 주고받는 장면은 관객의 몰입을 불러일으킨다. 1958년 아카데미 특수효과상 수상한 작품답게 스펙터클(spectacle)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J씨는 ‘상과 하’를 재미있게 관람하면서도 ‘우리나라는 저런 배를 언제 만드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에게 영화는 전쟁의 파괴력에 관한 생각보다는 선진 기술의 격전장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그것은 앞선 기술을 다룬 영화적 소재에 특수효과라는 영화적 장치에 대한 부러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영사기 고장 때문에 신포 사거리에 자리한 라디오 가게 기술자를 불러 수리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을까? 영사기사 J씨는 영사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열의를 다 보였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자연과학 기술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않던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서 공부하면서 영사기 사운드 증폭 기술을 비롯해 라디오와 TV 작동 원리까지 터득하였다. 전쟁영화가 추동한 과학기술에 대한 열망이 내셔널리즘과 만나면서 영사기사의 일상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외화를 통해 만난 서구 문화에 대한 감탄과 열등감(?)이 극장 밖 현실 즉, 1960년대 기술 후진국 한국 남성의 정체성 자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1960년대 상영 현장은 해외로부터 들여온 기술에 의지하여 운영되었다. 영사 관련 기계와 부품은 ’청계천‘으로 불리는 장사동 일대를 중심으로 전기제품을 취급한 곳에서 수급되었다. 해방과 함께 일본 군용 무선기와 부품이 등장하고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군 무선기기와 부품을 파는 노점상이 몰렸던 그곳은 미군 부대에서 “몰래 빼내온 물건도 꽤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 곳이었다. ‘청계천’ 이외에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을 통해 직접 영사 기계 관련 부품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1970~1980년대 초반까지 광주의 중앙극장에서 영화 배급업에 종사한 L씨의 구술 증언은 이를 알려준다.
![]() 영화 ‘상과 하(1957년)’ 신문광고 |
친인척을 중심으로 운영된 중앙극장의 관주(館主)는 당대 호남 지역에서 유명한 흥행사 이월금이었다. 그녀는 구월영화사를 거쳐 대호영화사를 운영하면서 영화 판권을 다수 보유한 흥행업계의 거물이었다. ‘일산(日産)을 제일’로 쳤던 그때 그녀는 세운상가의 업자들로부터 영사기를 구매하였다. 그녀가 거래한 업자들은 일본에서 폐기된 영사기를 구매하여 국내에 들여온 다음 재조립하여 극장에 판매했었다.
청계천 일대에 자리한 세운상가 이외에 일본과 직접 거래하기도 하였다. 영사기 고장으로 부품이 필요한 경우 일본 오사카에서 거주하던 자신의 남동생에게 기계 종류와 일련번호를 알려주고 부품을 입수했다. 1970년대 무역상을 통해서 촬영기를 비롯한 기계들이 공식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기 이전까지 사적인 연결망을 통해서 기술을 유입하는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따라서 L씨의 구술은 기술 국산화 이전까지 지인 또는 비합법적인 통로를 거쳐 전파된 영화상영 현장의 기술 전파 사실을 알려준다.
인천의 J씨가 영사 기술을 독학하면서 과학기술의 내셔널리즘을 보여주었다면, 부여의 H씨 사례는 영화를 동원하여 국민을 만들기에 집중하던 시절 영사기의 위력 자체를 보여준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충남 논산군 논산읍 논산극장 선전부원으로 일하면서 영사기 작동 방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1950년대 중반 문화영화 제작팀을 따라서 충남 부여에 들렀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부여극장을 발견했고 창고에 있던 35mm 영사기를 수리해서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부여극장은 음향 지원이 불안정한 16mm 영사기를 사용한 순업(巡業) 일행의 영화를 간헐적으로 상영하던 곳이었다. H씨는 비록 100석의 소규모 극장이었지만 입석까지 포함하면 최대 3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그곳에서 매일 영화를 상영했다. 그는 지역민에게 상설 극장을 운영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여군수와 경찰서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인천의 J씨와 부여의 H씨 모두 지난날 영사기사의 애환을 상적으로 보여주었다.
위경혜--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발전신문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