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지금은 사라진 단관극장, 지역 영화문화 선두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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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지금은 사라진 단관극장, 지역 영화문화 선두주자
<3> 한국전쟁과 영화: 전주 지역 영화 제작과 ‘극장의 힘’
일제강점기 개관 ‘전주극장’
뒷골목 다방엔 배우·악극단 모여들어
이강천 감독 ‘피아골’ 제작·기획 참여
70㎜ 영사기 전국 4대 중 2대 전주에
시민극장·중앙영화극장·삼남극장…
한국 첫 색채 극영화 ‘선화공주’ 등 제작
2024년 06월 19일(수) 18:10
전주 지역 극장 관계자들은 다양한 한국 영화 제작에 동참했다. 전주극장 김병기가 제작에 참여한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 촬영 현장.
올해로 한국전쟁 발발 74주년이 되었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spectacle)을 보여준다. 그래서 전쟁 영화는 대부분 오락물로 만들어진다. 지난 현충일에 개봉 20주년을 기념하여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가 재개봉했다. 개봉 당시 한국영화 역사상 최단기간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였다. 죽음을 불사하고 이념을 초월하는 형제애와 가족주의 그리고 전장의 한 가운데 관객이 놓인듯한 장면 구성은 ‘천만’으로 상징되는 흥행작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재개봉한 작품은 화질과 음질을 개선한 ‘4K 리마스터링(remastering)’ 버전이었기에 현장감과 사실성은 더욱 컸다.

2000년대 대표 한국전쟁 영화가 ‘태극기 휘날리며’라면 1960년대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일 것이다. 해병대의 대규모 지원을 받았으며 당시 특수효과의 미발달로 실제 무기를 사용하여 촬영된 영화였다. 이만희 감독은 한국전쟁에 통신병으로 참전한 ‘용사’였다. 사실적인 전투장면과 전우애 그리고 오락적 요소까지 갖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한국전쟁 영화의 규준을 제공한 영화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휴전을 맞이한 지 10년째 되던 1963년 관객 동원 1위를 차지한 이 ‘오락영화’는 한국인들이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징표로 읽혔다.

한국전쟁에 관한 극영화는 전쟁 당시부터 제작되었는데, 그것의 중심에 전주시 극장과 극장 관계자들이 있었다. 한국전쟁 기간 전주의 유일한 극장은 전주극장이었다. 일제강점기 개관한 전주극장은 조선 시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관할한 전라감영(全羅監營)의 객사(客舍) 풍패지관(豊沛之館)과 가까운 곳에서 영업했다. 전직 한국일보 기자 정익환에 따르면, 1950년대 초반 전주극장 뒷골목은 다수의 다방(茶房)이 포진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우인다방으로 영화배우와 악극단 단원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전라북도 경찰국 공보실 담당 김종한은 이들 연예인을 동원하여 빨치산 선무(宣撫) 작업을 펼쳤다.

또한, 그는 전직 경찰서장 박동섭이 전주 지역 최초로 ‘애정산맥’(이만흥, 1952)을 제작할 때 시나리오 원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는 한 여성을 사랑하는 친구 사이 두 남성이 각각 경찰과 빨치산으로 활동하는데, 결국 여성이 빨치산을 경찰에 신고하여 소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줄거리에 ‘신고’를 포함한 것으로 보아 이 영화는 빨치산 선무 활동을 수행한 김종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국민 계도 목적이 분명한 ‘애정산맥’은 38선에서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던 1952년 4월 14일 부산의 부민관(府民?)에서 개봉했다. 부산에서 ‘애정산맥’이 개봉한 같은 달 중하순 경 광주역 역사 앞은 ‘K.A.S 신써커스단’의 공연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쟁 중에도 일상은 계속되었고, 삶이 힘들수록 사람들은 오락을 원했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전주의 영화 제작은 휴전 이후에도 이어졌다. 후생극장(厚生劇場)이 문을 열면서부터였다. 후생극장은 전주극장에서 경기전(慶基殿) 방향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공터에 들어섰는데,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경유가족을 돕기 위한 흥행장이었다. 극장으로 불리기에는 제대로 된 건물이나 영사 시설을 갖추지 못한 가설극장이었다. 천으로 사방을 두르고 맨땅에 가마니를 깔았으며 지붕은 미군 부대에서 얻은 깡통을 늘려서 만들었다. 그래서 깡통극장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후생극장 일대는 싸구려 약장수와 서커스 또는 유랑 극단이 자주 들리던 곳이었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후생극장은 전직 전주경찰서장의 가족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경영상 어려움을 맞이하면서 김영창과 백남석에게 넘어갔다. 이후 공모를 통해 백도극장(百都劇場)으로 개명하고 의자를 들여놓은 객석을 갖춘 목조 건물로 재탄생했다. 주목할 일은 백도극장 운영자 김영창이 같은 극장 지배인 조진구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아리랑’(이강천, 1954)을 제작한 사실이었다. 해당 영화의 제목은 일제강점기 최고 흥행작 ‘아리랑’(나운규, 1926)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홀아버지와 여동생과 함께 사는 광인(狂人) ‘영진’이 악덕 지주의 앞잡이를 우연히 살해하면서 정신이 돌아오지만, 일제 순사에 의해 ‘아리랑고개’를 넘어 끌려간다는 내용이다.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은 ‘영진’의 가족 구조를 빌려오지만, 시공간은 한국전쟁 동안 북한군이 점령한 어느 산촌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영진’의 여동생이 목숨을 걸고 낙오된 미군 병사들을 은닉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남겨진 미군 병사의 귓가에 “싸워주세요, 우리 한국을 위하여”라는 말이 맴돌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한미동맹을 강조한 계도성이 강렬한 이 영화는 반일의 기억을 반공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미군 병사들의 출연을 이유로 언론에 ‘한국 최초의 한미합작영화’로 소개되었다.

사라진 옛 전주극장 자리에 설치된 표지석. <위경혜 제공>
전주 지역 극장 관계자의 한국전쟁 영화 제작은 전주극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전주극장 김병기는 ‘피아골’(이강천, 1955)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이 작품은 적대적인 이념 갈등으로서 한국전쟁에 접근하기보다는 휴머니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다. 또한, 극적 세계에 국군 또는 경찰을 등장시키지 않고 오직 빨치산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인물 각자의 인간적인 욕망과 갈등을 드러낸다. 그래서인지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 죄목으로 상영이 금지된 최초의 영화로 기록된다. 다행히 마지막 장면에 홀로 하산하는 빨치산 여전사를 배경으로 태극기를 전면에 배치하면서 영화는 재상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강천은 이 작품으로 ‘제1회 금룡상’에서 감독상까지 받았다.

1956년 이강천은 한국전쟁 관련 또 다른 영화 ‘격퇴(우리는 이렇게 싸웠다)’를 감독했다. 경기도 연천군에서 발생한 ‘베티고지 전투’의 영웅 김만술 대위의 한국전쟁 참전 실화를 극화한 작품이었다. ‘피아골’을 감독하면서 용공 논쟁에 시달려서인지 이강천 감독은 한국군에 대한 인간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반공정신에 투철한 계몽성이 강한 이야기로 결론을 맺는다. ‘격퇴(우리는 이렇게 싸웠다)’의 제작에 백도극장 운영자 김영창이 참여했다.

전주의 극장 관계자들이 제작한 이들 영화는 반공 이념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제작 환경이 척박하던 때 한국영화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 전주의 극장가 영화인들이 전쟁에 따른 폐허 가운데 부족한 기술과 열악한 재정을 딛고 한국영화 제작에 앞장서 나갔기 때문이다. 김영창은 ‘격퇴(우리는 이렇게 싸웠다)’를 제작한 이듬해 ‘선화공주’(최성관, 1957)의 제작과 기획자로 활동을 이어갔다.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백제의 서동을 둘러싼 향가(鄕歌)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었다. 이전까지 전쟁 영화를 만든 김영창이 근대 이전을 배경으로 사랑 이야기를 선보인 것은 특기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 위안을 찾기 시작한 대중의 마음을 반영한 선택이었다. 분단 고착과 이념 갈등 그리고 일상적 폭력이 발생하는 현실을 떠나 근대 이전 시기로 돌아가 얻을 수 있는 위로였다. ‘선화공주’는 전주를 포함한 전라남북도 일대의 풍광을 스크린에 담았으며 한국 최초의 색채 극영화라는 기록을 세웠다.

사라진 옛 삼남극장 자리에 설치된 표지석. <위경혜 제공>
한국영화의 역사를 진전시킨 전주 지역 ‘극장의 힘’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57년 1,000석에 가까운 시민극장과 중앙영화극장이 문을 열었고, 1960년대 초반 백도극장은 ‘씨네마 오스카’를 거쳐 아카데미극장으로 개명하고 영업을 이어갔다. 게다가 1962년 3월 한 달 동안 고사동에 200m 거리를 두고 코리아극장과 삼남극장이 문을 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극장이 각각 70mm 영사기를 갖춘 일이었다. 당시 전국에 4대밖에 없었던 앞선 기술의 영사기를 한 도시가 소지한 일은 1950년대 영화 도시 전주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전주에 제일극장까지 개관하면서 고사동은 ‘영화의 거리’가 되었다.

이제 그 많던 단관 극장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전주국제영화제가 사라진 단관 극장의 자리에 표식물을 설치하여 기념하고 있다. 이는 1950년대 ‘한국의 할리우드’를 꿈꿨던 곳이자 현재 서울을 벗어난 지역에서 ‘성공적인’ 국제영화제를 개최하는 도시에 대한 칭송이라기보다는 지역민과 함께 희로애락을 공유한 장소에 대한 기억 작업이다. 그래서인지 지난날 전주에 못지않은 극장가 번성을 누린 광주에 있었던 단관 극장의 자취를 알 수 없는 일은 안타깝다. 극장의 흔적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도시와 함께 숨 쉬었던 사람들에 대한 또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될 것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위경혜

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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