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비디오 등장에 영화 관람 일상화 … 공익·불법복제 ‘두얼굴’
<7> ‘애마부인’, ‘광주 비디오’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1980년대 VCR 보급으로 비디오 활성화
연소자 관람 불가 ‘애마부인’ 등 누구나 관람
폭발적 인기에 대여 가게 3만5000곳 성업
5·18 진실 전파·교육 방송 등 순기능 동시
불법복제 비디오 테이프, 영화산업 위협
DVD 디지털 시대 개막…2006년 생산 중단
1980년대 VCR 보급으로 비디오 활성화
연소자 관람 불가 ‘애마부인’ 등 누구나 관람
폭발적 인기에 대여 가게 3만5000곳 성업
5·18 진실 전파·교육 방송 등 순기능 동시
불법복제 비디오 테이프, 영화산업 위협
DVD 디지털 시대 개막…2006년 생산 중단
![]() 비디오의 등장으로 영화관람은 일상이 됐고 1990년대 중반 비디오 대여점은 3만 5000여개에 달했다. 2023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원초적 비디오 본능’전에서는 조대영씨가 수집한 비디오 수천여점이 소개됐다. <위경혜 제공> |
1980년대 한국영화 흥행을 대표하는 작품은 ‘애마부인’(정인엽, 1982)이었다. 최초의 심야 영화 상영작품이었고 13편까지 만들어지면서 ‘최다 시리즈’ 제작 영화로 기록되었다. ‘애마부인’을 말하면 주연 배우 안소영의 육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면서 주요 소비층이 남성 관객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해당 영화는 중년 여성 관객의 구매력이 크게 작용하면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이다. 연하남과의 순수한 사랑과 더불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성적 주체로서 중년 여성의 성적인 모험을 다루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로 ‘애마부인’을 지목하는 이유는 그것의 상영 방식과 관련이 깊다. 1980년대는 비디오의 시대 즉, 무한 복사와 재생을 통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시대였다. 1970년대 후반에 이뤄진 VHS(Video Home System 가정용 비디오 시스템) 기술에 기반한 비디오테이프의 등장은 영화 상영과 관람의 공간을 무한정 확장했다. 사람들은 극장이라는 공적 공간이 아니라 사적인 또는 은밀한 장소에서 영화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빨리 감기’ 또는 ‘되감기’를 가능하도록 만든 조그셔틀(Jog Shuttle)로 불린 자유 변속 탐색 기능으로 인하여 관객은 특정 장면을 선택적으로 반복하여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연소자 관람 불가’였던 ‘애마부인’의 비디오테이프를 입수만 한다면 어디에서든 누구든지 볼 수 있었다. 비디오테이프의 혜택은 ‘애마부인’ 시리즈에서 그치지 않았다. ‘토속 에로물’로 불리는 ‘뽕’(이두용, 1985)과 ‘변강쇠’(엄종선, 1989) 시리즈의 영화도 등장했기 때문이다.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비디오 출시 회사를 비롯해 동네 비디오 가게가 연달아 문을 열었다. ‘영화마을’과 ‘으뜸과 버금’ 그리고 ‘영화랑 책이랑’ 등과 같은 프랜차이즈가 있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영화에 관한 정보지를 발간하여 소비자의 이해를 도왔다.
1989년 약 2만 개로 추산된 전국의 비디오 가게는 1990년대 중반 3만 5000 개로 비공식 집계되었다. 비디오 대여료는 프랜차이즈와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따라서 차이를 보였다. 보통 개당 500원부터 몇천 원 사이에 가격이 형성되었으나 무료 또는 덤핑으로 몇 개를 묶어서 가격을 매기기도 했다. 신작은 이전에 나온 영화보다 최소 두 배는 비쌌으며, 24시간 또는 며칠 이내에 반납하지 않을 경우, 하루에 500원의 연체료를 부과했다 하지만 비디오 가게 주인들은 심성이 착하고(?) 영화에 대한 애정도 넘쳐서 자신의 매장에 비디오테이프가 없으면 다른 매장에서 빌려다 주었다. 물론 대여 중인 비디오테이프는 케이스(case)를 뒤집어서 진열했기 때문에 소비자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수요는 영상을 녹화하고 시청하기 위한 기기 장치 즉, 비디오 플레이어(Video Cassette Recorder, VCR) 보급의 증가를 의미했다. 1989년 4가구당 1대가 보급된 것으로 전해진다. 1994년 처음으로 실시한 ‘수학능력평가시험(약칭 수능)’에 대비하기 위하여 ‘한국교육방송(EBS)’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는 명목으로 구매하는 가정도 늘었다. 한 가구당 1대의 VCR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디오테이프의 등장은 영화 관람을 일상적인 문화로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영화 산업에 위협적인 존재로도 인식되었다. 불법복제 비디오테이프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법성’은 1980년대 부정(不正)한 정권을 부정(否定)하고 사회 변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양가성을 지녔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촬영한 영상이 독일과 미국 등 해외에서 상영되고 1980년대 중후반 광주에 들어와 비디오테이프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복제에 복제를 거친 ‘광주 비디오’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상업적이든 정치적이든 ‘불법’ 복제의 위력을 의식해서인지 1990년대 초반 비디오테이프에 ‘건전비디오 홍보 영상 내레이션’이 수록되었다. 즉,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로 시작되는 해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상의 마지막은 “한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로 끝을 맺었다. 해당 문구의 말처럼, 비디오 관람이 일회성 이미지 소비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변화를 꿈꾸게 될지는 관객에게 달려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디오테이프가 가져온 파장은 영화 복제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의 출발은 16mm 필름으로 제작한 독립영화였다. 1980년대 초중반부터 만들기 시작한 독립영화는 주류 상업영화와 달리 ‘자본과 지배 이데올로기부터 독립’을 표방했다. 그들의 성과는 1989년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최초의 장편 극영화 ‘오! 꿈의 나라’로 나타났다. 해당 영화는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던 주인공이 광주를 빠져나와 동두천 미군 기지 근처에서 PX 물건을 불법 거래하는 선배 집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는 주인공의 기억을 통해 계엄군의 진압을 이야기하고 기지촌 여성과 미군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미국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오! 꿈의 나라’는 독립영화계에서 처음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삼은 점에서 주목되었다.
또한, 150개 지역에서 500회 이상 상영하면서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사회문제를 직접 제기하는 영화는 노동자 파업 과정을 담은 장편 극영화 ‘파업전야’(1990)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부는 계급의식 고취와 파업 선동을 이유로 해당 영화의 상영을 금지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인기리에(?) 상영되었고, 전남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 상영을 막기 위해 경찰 헬리콥터가 캠퍼스 하늘 위를 날았지만, 관람을 마친 학생과 광주시민은 언제든지 시위대로 변할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 독립영화는 2001년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영화의 파급력에 못지않은 것이 비디오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보급된 비디오카메라는 독립영화인들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중요한 소임을 수행했다. 비디오는 필름과 비교하여 화질이 낮았지만, 조작과 휴대가 편리하고 영화를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저렴했기에 접근성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현장에서의 대응력이 뛰어났다. 따라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한 이후 1989년 노동운동 영상집단인 ‘노동자뉴스제작단’이 결성되었다. 이전까지 ‘공돌이’ 또는 ‘공순이’로 비하되던 존재가 아니라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 노동자의 위치를 재설정하고 노동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들의 노력은 1989년 봄 63분 분량의 ‘노동자뉴스 1호’를 발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운동 소식을 빠르게 전달하고 현장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VHS 시스템 즉, 비디오테이프로 제작되었다.
사회를 변화하는 데 비디오가 수행한 역할은 뉴스의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빈민을 철거하던 현장을 기록한 ‘상계동 올림픽’(김동원, 1988)이 주목되기 때문이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판잣집과 달동네를 외국에 보여주기 싫다는 이유로 도시 빈민의 주거지를 파괴했다. 해당 영화는 상계동에서 발생한 철거와 강제이주로 집을 잃은 철거민들의 삶과 투쟁을 다루고 있다. ‘상계동 올림픽’의 역사적인 의의는 영화를 통한 사회 참여의 주체가 영화인을 넘어서 일반 시민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영화를 촬영할 때 상계동 주민들이 직접 촬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비디오카메라가 조작이 쉬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매체 도입이 사회를 변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비디오테이프는 특정 시기 지역적인 문화 차이를 해소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 그것은 1995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SBS의 드라마 ‘모래시계’와 함께였다. 당시 광주지역은 SBS가 송출되지 않아서 방송을 볼 수 없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나오는 ‘모래시계’의 7부와 8부는 비디오테이프로 먼저 퍼져나가서 광주시민을 만났다. ‘광주 비디오’를 통해 공론을 형성하고 민주화운동을 촉발하였던 것이 상업 방송을 통해 대중과 만나 폭발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2006년 11월 화려했던 비디오테이프 시대의 종말이 공표되었다. 디즈니 홈 엔터테인먼트 북미 지역 총괄 매니저가 ‘시장에서 VHS를 더는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한때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 The Lion King’(1994)의 비디오 3000만개를 팔았던 회사의 발표였다. 영화와 연계된 비디오 산업의 전성기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DVD(Digital Video Disc) 플레이어를 비롯해 디지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024년 현재 스마트폰을 포함한 다양한 기기로 영상물을 만드는 시대,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공유할 것인지 숙의(熟議)가 필요하다.
위경혜 : 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비디오 출시 회사를 비롯해 동네 비디오 가게가 연달아 문을 열었다. ‘영화마을’과 ‘으뜸과 버금’ 그리고 ‘영화랑 책이랑’ 등과 같은 프랜차이즈가 있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영화에 관한 정보지를 발간하여 소비자의 이해를 도왔다.
1989년 약 2만 개로 추산된 전국의 비디오 가게는 1990년대 중반 3만 5000 개로 비공식 집계되었다. 비디오 대여료는 프랜차이즈와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따라서 차이를 보였다. 보통 개당 500원부터 몇천 원 사이에 가격이 형성되었으나 무료 또는 덤핑으로 몇 개를 묶어서 가격을 매기기도 했다. 신작은 이전에 나온 영화보다 최소 두 배는 비쌌으며, 24시간 또는 며칠 이내에 반납하지 않을 경우, 하루에 500원의 연체료를 부과했다 하지만 비디오 가게 주인들은 심성이 착하고(?) 영화에 대한 애정도 넘쳐서 자신의 매장에 비디오테이프가 없으면 다른 매장에서 빌려다 주었다. 물론 대여 중인 비디오테이프는 케이스(case)를 뒤집어서 진열했기 때문에 소비자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 ‘광주 비디오’를 통해 5·18 참상을 세계에 최초로 알린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 부부의 2004년 광주 방문 모습. |
비디오테이프의 등장은 영화 관람을 일상적인 문화로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영화 산업에 위협적인 존재로도 인식되었다. 불법복제 비디오테이프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법성’은 1980년대 부정(不正)한 정권을 부정(否定)하고 사회 변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양가성을 지녔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촬영한 영상이 독일과 미국 등 해외에서 상영되고 1980년대 중후반 광주에 들어와 비디오테이프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복제에 복제를 거친 ‘광주 비디오’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상업적이든 정치적이든 ‘불법’ 복제의 위력을 의식해서인지 1990년대 초반 비디오테이프에 ‘건전비디오 홍보 영상 내레이션’이 수록되었다. 즉,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로 시작되는 해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상의 마지막은 “한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로 끝을 맺었다. 해당 문구의 말처럼, 비디오 관람이 일회성 이미지 소비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변화를 꿈꾸게 될지는 관객에게 달려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디오테이프가 가져온 파장은 영화 복제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의 출발은 16mm 필름으로 제작한 독립영화였다. 1980년대 초중반부터 만들기 시작한 독립영화는 주류 상업영화와 달리 ‘자본과 지배 이데올로기부터 독립’을 표방했다. 그들의 성과는 1989년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최초의 장편 극영화 ‘오! 꿈의 나라’로 나타났다. 해당 영화는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던 주인공이 광주를 빠져나와 동두천 미군 기지 근처에서 PX 물건을 불법 거래하는 선배 집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는 주인공의 기억을 통해 계엄군의 진압을 이야기하고 기지촌 여성과 미군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미국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오! 꿈의 나라’는 독립영화계에서 처음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삼은 점에서 주목되었다.
또한, 150개 지역에서 500회 이상 상영하면서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사회문제를 직접 제기하는 영화는 노동자 파업 과정을 담은 장편 극영화 ‘파업전야’(1990)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부는 계급의식 고취와 파업 선동을 이유로 해당 영화의 상영을 금지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인기리에(?) 상영되었고, 전남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 상영을 막기 위해 경찰 헬리콥터가 캠퍼스 하늘 위를 날았지만, 관람을 마친 학생과 광주시민은 언제든지 시위대로 변할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 1990년대 초반 비디오테이프에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비디오 홍보 영상 내레이션’이 수록됐다. |
사회를 변화하는 데 비디오가 수행한 역할은 뉴스의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빈민을 철거하던 현장을 기록한 ‘상계동 올림픽’(김동원, 1988)이 주목되기 때문이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판잣집과 달동네를 외국에 보여주기 싫다는 이유로 도시 빈민의 주거지를 파괴했다. 해당 영화는 상계동에서 발생한 철거와 강제이주로 집을 잃은 철거민들의 삶과 투쟁을 다루고 있다. ‘상계동 올림픽’의 역사적인 의의는 영화를 통한 사회 참여의 주체가 영화인을 넘어서 일반 시민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영화를 촬영할 때 상계동 주민들이 직접 촬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비디오카메라가 조작이 쉬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매체 도입이 사회를 변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비디오테이프는 특정 시기 지역적인 문화 차이를 해소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 그것은 1995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SBS의 드라마 ‘모래시계’와 함께였다. 당시 광주지역은 SBS가 송출되지 않아서 방송을 볼 수 없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나오는 ‘모래시계’의 7부와 8부는 비디오테이프로 먼저 퍼져나가서 광주시민을 만났다. ‘광주 비디오’를 통해 공론을 형성하고 민주화운동을 촉발하였던 것이 상업 방송을 통해 대중과 만나 폭발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2006년 11월 화려했던 비디오테이프 시대의 종말이 공표되었다. 디즈니 홈 엔터테인먼트 북미 지역 총괄 매니저가 ‘시장에서 VHS를 더는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한때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 The Lion King’(1994)의 비디오 3000만개를 팔았던 회사의 발표였다. 영화와 연계된 비디오 산업의 전성기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DVD(Digital Video Disc) 플레이어를 비롯해 디지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024년 현재 스마트폰을 포함한 다양한 기기로 영상물을 만드는 시대,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공유할 것인지 숙의(熟議)가 필요하다.
위경혜 : 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