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세상 유람하며 한량의 삶…지역발전 위한 계몽 활동 사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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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세상 유람하며 한량의 삶…지역발전 위한 계몽 활동 사명감
<11> 이동 영사를 선택한 각기 다른 사연들
1. 세계 유람
2. 나라 사랑
3. 지역 사랑
2024년 11월 19일(화) 00:00
극장 밖에서 이동 영사를 통해 영화를 상영한 사람들이 주로 틀었던 작품은 ‘리버티 뉴스’, ‘대한뉴스’, 문화영화 등이었다. 산아제한, 쥐를 잡자, 콜레라 예방 등 다양한 주제로 제작됐던 ‘대한뉴스’.
극장 밖에서 영화를 상영한 사람들은 이유야 어떻든 모두 ‘밥 먹고 살려고’ 일했다. 하지만 생계유지의 방편을 넘어 순업 또는 이동 영사를 선택한 사람들의 사연은 각기 달랐다. 세상을 유랑하면서 한량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라 사랑’을 앞세운 사람 그리고 ‘내 고향 발전’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전남 진도군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상영한 박수민(가명)은 첫 번째 경우에 속한다. 1925년 진도군 출생인 그는 어려서부터 인척이 운영한 목포극장을 들락거리면서 영화 세계에 입문하였다. 목포극장 직원들과의 인연은 1950년대 후반 그가 순업 인생을 시작한 배경이 되었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진도에서 화포(靴布) 배급과 전업(電業)회사 그리고 염전(鹽田)을 운영한 사업가이자 유지였다. 지역 사회 사정에 밝은 그는 1950년대 중반 목포극장 영사기사가 진도군에서 순업을 시작하자 ‘뒤를 봐주다가’ 직접 흥행에 나섰다.



그는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창(唱)을 선호하는 지역민을 위하여 ‘소리꾼’을 불러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순업을 통해 본격적인 흥행사의 길에 들어선 것은 국산 영화 작품 숫자가 늘어나고 필름의 간접 배급 체계가 정착된 이후였다. 1960년대 초반 한양영화사라는 이름을 걸고 진도군을 떠난 그는 전남 곡성군을 거쳐 충남 천안시 성환면(현 성환읍)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다. 흥미롭게도 이들 지역에서 영화를 상영한 곳은 문화원이었다. 그곳에서 정부 시책에 따라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상영하고 돈을 받으며 극영화를 보여주었다.

문화원에서의 영화 상영은 흥행 성적이 좋았으나 오래 가지 못하였다. 지역 청년과 상이군인 단체의 ‘텃세’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순회했는데, 그가 이동한 경로를 보면 순업이 1960년대 영화 상영의 전국화를 달성하는 데 톡톡히 이바지한 바를 알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고향 진도군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서도 순업을 계속하였다. 그에게 순회 흥행은 때로 낭만이었고, 때로 남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 순업은 ‘건달 사업’이었다. 건달은 ‘놀고먹는 사나이’라는 뜻이었지만, 그리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는 말도 아니었다. 그에게 건달은 ‘다방면으로 유능한’ 사람을 의미하였다. ‘주먹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연애도 잘해야만’ 낯선 타지에서 흥행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의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 순업 흥행사로 평생을 보낸 애환이 담겨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순업의 흥행 보장을 위해 다양한 술수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의 반영이었다.

‘나라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순업에 뛰어든 자는 전남 해남군 서수민(가명)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퇴역 경찰과 상이군인 가운데 이동 영사를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상이군인과 퇴역 경찰의 일부가 반공 국가 국민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영화 상영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전남 군(郡) 지역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해남군에서 ‘해남영화반’을 운영하였다. 1910년대 출생으로 추정되는 그는 식민지기 해남군에서 전기 관련 업무에 종사하다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는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독립청년단원으로 활동하고 ‘G-2’의 요원으로 참여하였다. G-2는 한국 내 첩보 활동과 정보 수집 그리고 한국인 정치 지도자 사찰을 전담하면서 우익 반공 청년 단체와 연계 및 활동하였다. G-2의 활동과 참여 인력 그리고 신분은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장남(1937년생)의 구술 증언을 통해 전해질 뿐이다. 그는 아버지의 순업을 도와서 해남영화반의 영사 기계 정비를 담당했고 1970년대 몇 년 동안 해남극장을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에 참여한 서수민은 ‘9·28 서울 수복’과 함께 북진하던 도중 인민군에 의해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그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귀향한 다음 해남군 계곡면 흑석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대상으로 선무(宣撫) 작업을 수행하였다. 전투와 선무와 교차하는 가운데 서수민은 얼굴의 입과 목에 총알이 관통하는 상처를 입게 된다. 부상으로 음식 섭취와 대화가 불편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의 얼굴에 난 상흔은 해남군 행정 기관과 경찰 관료들로부터 예우를 받는 ‘애국의 증거’이자 ‘육화된 훈장’이 되었다.

그는 상이군인에게 주어진 혜택 - 보훈처 상이군인 등록과 연금 지급 등 - 도 거부하고 입버릇처럼 ‘국가를 위해 마땅한 일’을 했다고 되뇌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청소년 시청각 교육’을 이유로 학생 대상 무료 영사에 나섰다. 교육과 계몽을 앞세운 그의 이동 영사에 퇴역 경찰과 반공 이념을 앞세운 청년운동 후배들이 동참하였다. 광주에 소재한 미국 공보원으로부터 받은 ‘리버티 뉴스(Liberty News)’를 비롯해 공보부의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를 챙긴 그는 일주일 또는 보름 단위로 새로운 필름으로 교체해가며 선전 활동에 나섰다. 그는 ‘해남영화반’이라는 이름을 걸고 조랑말이 이끄는 손수레에 16mm 영사기와 확성기 그리고 조명에 쓰이는 카보나이트(carbonate)를 싣고 해남군 일대를 순회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수민은 흥행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꾀하였다. 주간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계몽영화를 상영하는 한편으로 야간에 흥행 목적으로 35mm 상업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수입한 35mm 영사기와 군부대에서 사용된 지프(jeep) 자동차 엔진을 영사용 발전기로 조립한 이후 해남군 일대와 강진군 그리고 영암군 일부 지역을 돌았다. 해남군 13개 면(面) 전체와 인근 군 단위 마을까지 아우르기 위해 순회 영사 차량을 세 개의 조(組)로 구성했으며, 조별 인원도 9~10명씩 배치하였다. 당시 필름 간접 배급 체계에 따라 영화 필름은 도시의 개봉관에서 상영을 마친 다음 비도시 상설극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업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해남영화반은 순회 지역도 넓고 흥행 성적도 좋았던 까닭에 광주의 배급사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따라서 군(郡) 지역 상설극장과 비슷한 시기에 신작을 개봉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순업을 하면서 누린 혜택은 행정상 절차를 순조롭게 진행한 사실이다. 1960년대 순업이 영화를 상영하려면 해당 지역 경찰서에 집회 허가를 받고 면사무소에 상영 신고를 해야 했으며, 이들 각 기관에 영화 대본을 제시하는 것이 의무였다. 하지만 서수민은 반공 활동 이력이 확실하다는 점과 해남 지역에서 ‘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절차는 형식적인 것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 후반 해남극장을 사들인 서수민은 상설극장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해남읍 인근 마을에서 해남극장과 시차를 둔 ‘동시 상영’ 형식의 순업을 계속하였다. 극장으로 올 수 없는 지역민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1970년대 흑백 TV 보급이 이뤄지고 1980년대 컬러 TV가 등장하자 관객 수가 급감하여 결국 해남극장을 팔았다.

전북 고창문화원 초대 원장 이기준(가명)은 지역 발전과 향토 계몽을 위해 영화를 상영한 경우이다. 1935년 전북 고창군에서 태어난 그는 전북대 농과대학을 다니다가 25살 젊은 나이에 제3대 지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그는 사재를 동원하여 고창문화원을 설립한 이후 2000년대 후반까지 고창문화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흥행사라기보다 공리(公利)를 내세우며 ‘향토 발전’을 위해 시골 마을을 돌며 영화를 상영한 지역 문화 엘리트였다.

이기준은 식민지기 고창읍에서 제재소(製材所)를 운영하면서 마을 구장(區長)을 지낸 선친 덕분에 일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영화를 일찍부터 관람하였다. 식민권력이 제작한 뉴스영화를 통해 개량 농사법과 일본의 산업화 그리고 전선(戰線) 소식을 접한 어린 그는 ‘세계상의 변화’를 전하는 창구로서 영화를 인식하였다. 게다가 영화라는 기계 매체의 충격은 ‘직접 영화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자각까지 들도록 하였다.

해방 이후 한 달에 한 번 고창읍에 들린 미국 공보원 16mm 영화 상영 역시 그에게 문명과 계몽을 전달하는 매혹적인 일로 보였다. 그리하여 1960년 청년 정치가로 첫발을 딛으며 시작한 일이 ‘지역민의 지지에 사례(謝禮)’를 내세운 이동 영사 활동이었다. 그가 상영한 영화는 광주 미국 공보원 제공 ‘리버티 뉴스’였다. 1950년대 전국 문화원 설립에 적극적이었던 미 공보원이 제작한 ‘리버티 뉴스’의 내용은 반공과 UN 연대, 자유민주주의 우월성과 미국식 생활 문화 소개 등으로 채워졌다. 미국 공보원으로부터 무상으로 빌린 16mm 영사기와 발전기를 갖추고 영사기 사용법 교육까지 받은 그는 고창군 전역을 순회하기 시작하였다.

고창문화원장 이기준의 영사는 ‘리버티 뉴스’, ‘대한뉴스’와 문화영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업 극영화 차례로 이뤄졌다. 상업 극영화는 고등학교 선배가 근무하는 광주에 소재한 은영영화사 지점을 통해 공급받았다. 공보와 계몽을 앞세운 문화원의 영사 순서는 흥행을 추구한 순업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문화원의 이동 영사가 순업과 달랐던 것은 영화 상영 막간을 이용한 문화원장 이기준의 계몽 주제 강연과 자수 간첩의 반공 강연 그리고 경찰지서의 공지사항 전달 등이었다. 향토 계몽 의지에 불탄 그의 이동 영사는 1960년대 초반까지도 대중매체 보급이 저조한 지역민에게 외부세계의 변화와 국내외 정보를 전달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표현처럼 지역민의 ‘관심을 끝까지 붙잡아두기 위해’ 상영된 무료 상업 영화 상영은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 오락을 제공하였다. 그의 영화 상영은 신문물과 오락을 제공하여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는 ‘향토 사랑’의 다른 모습이었다.



위경혜 - 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발전신문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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