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다…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다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다…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자유·평화 향한 신념 기억
1998년 형무소에서 역사관으로
시대별 변천사 한눈에 ‘전시관’
12옥사 벽면에 걸린 ‘대형태극기’
수형기록표 4800장 벽면 눈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자유·평화 향한 신념 기억
1998년 형무소에서 역사관으로
시대별 변천사 한눈에 ‘전시관’
12옥사 벽면에 걸린 ‘대형태극기’
수형기록표 4800장 벽면 눈길
![]()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서대문형무소는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탈바꿈, 미래 세대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4m높이의 담장 주위를 걸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담장에 접한 10m 높이의 감시탑도 눈에 보인다. 보통 사람의 삶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을 장소 형무소. 책과 영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형무소 안으로 발길을 옮기며 많은 생각을 한다.
1908년 일제가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서울 서대문형무소는 이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1945년 해방까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곳이고 해방 이후에도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민주인사들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던 곳이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것을 계기로 서울 서대문구는 성역화 사업을 진행했고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국가사적 제 324호)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신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역사관으로 운영중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방문객은 코로나 19 이전 연간 70만명 수준이며 역사를 배우는 학생 관람객들이 많다. 취재차 방문했던 날도 초등학생들이 문화관에서 제공하는 학습지를 보며 전시를 관람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들른 곳은 형무소를 관리하기 위해 간수들이 업무를 보았던 보안과 청사를 그대로 활용한 전시관이다.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1908~1987)을 주제로 형무소의 시대별 변천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3개의 전시실로 나뉜 ‘민족저항실’은 대한제국 말기 의병부터 1945년 해방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항일 독립운동가들과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민족저항실 2’에 들어서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어서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건 독립운동가의 수형기록표 4800장.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이다.
지하 고문실로 내려가는 발길은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독립운동가를 취조하였던 공간인데 수감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아 ‘지하 고문실’이라 불렸고 생존 애국지사의 육성 증언이 전시돼 있다.
수감자들이 실제 투옥됐던 건물인 옥사에 들어선다. 2층 벽돌 구조로 총 46개의 감방이 배치돼 있는 12옥사. 빛이 차단돼 ‘먹처럼 깜깜하다’고 해 일명 ‘먹방’으로 불렸던 2.4㎥ 넓이의 징벌방에 들어서자 숨이 막힌다. 또 다른 옥사에서는 민주 인사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문익환 목사, 이돈명 변호사 등 엄혹한 시대에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이들을 소개하는 곳이다.
그밖에 수감자들이 노역을 했던 공장 건물인 공작사, 간수들이 수감자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근무했던 공간인 중앙사,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을 따로 격리·수용했던 한센병사 등도 보인다.
여성 미결수가 수감되었던 여옥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망루 앞 여옥사 8호 감방은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어윤희·권애라·신관빈·심녕철·임명애 등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던 곳이다. 특히 감방 안에 세워진, 동덕여고 동기생 이효정(1913~2010) 박진홍(1914~미상)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서로 생사를 모르다 1935년 옥사에서 만난 그들이 두 손을 맞잡고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 뭉클하다. 서대문형무소에 다섯번이나 수감됐던 박진홍은 마지막 수감 땐 임신 상태였고, 감옥에서 키웠던 아이 이름은 ‘철창이 한이다’란 뜻의 철한(鐵恨)이었으나 두 해를 못 넘겨 사망했다.
형무소 맨 안쪽에는 사형장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는 ‘통곡의 미루나무’가 서 있다. 사형장으로 들어가기 전 사형수들이 원통한 마음에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는 유래가 전해지는 슬픈 나무다. 2020년 8월 100여년의 수령으로 쓰러졌는데, 사형장의 역사와 함께 한 통곡의 미루나무를 기억하기 위해 쓰러진 나무를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1층 목조건물로 이뤄진 사형장은 을씨년스럽다. 마치 무대처럼 보이는, 커튼이 쳐진 공간에 목을 매다는 밧줄과 나무의자가 놓여있다. 일제강점기부터 1987년 서울구치소 이전까지 실제 사형이 집행됐던 건물로 사형후 시신을 바깥 공동묘지로 이동하기 위해 외부와 연결해 둔 비밀통로 시구문도 눈길을 끈다.
12옥사 붉은 벽돌 담장엔 대형 태극기가 당당히 걸려 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역사의 현장과 그 때의 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의미처럼 보인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대한민국, 여기서 시작하다’
지난 3월 개관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으로 향하는 지하철 역사에 새겨진 글귀다. 대한민국의 건립과 민주공화정의 시작을 보여주는 임시정부기념관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어 함께 관람하면 좋다.
3개 층에 꾸져진 상설전시관은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인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27년간 정부로서 활동한 과정을 들여다보는 ‘군주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대한민국 국회의 시초인 임시의정원의 의회활동과 정당을 살펴보고 임시정부를 도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람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로부터 ‘헌법’과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와 국호·연호, 국가의 상징과 기념일 등을 이어받은 과정을 만날 수 있는 ‘임시정부에서 정부로’ 등이다.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바로 ‘그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된 배경을 보여주는 파노라마 작품은 인상적이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집에 모인 독립운동가 29명이 10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치열한 회의를 거쳐 대한제국을 잇는다는 뜻에서 ‘대한’을, 주권을 국민이 가진다는 의미에서 ‘민국’을 택해 대한민국을 국호로 삼는다.
1946년 3월1일 제 27회 기념식에서 행해진 조소앙 임시정부 외무부장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우리나라를 독립국으로 하오리다. 우리 동포로 하여금 자유민이 되게 하오리다(중략) 그렇지 못하게 되면 나의 몸을 불에 태워죽여라. 대한독립만세! 임시정부 만세’라 외치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또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의 빛바랜 사진, 한·중·영문 애국가 악보, 상하이에서 체포 위기에 몰린 김구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켜 무사히 피신시킨 피치 목사 가족의 모습 등 귀한 자료들이 많다.
한계륜 작가의 대형 미디어 작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길-돌아오기 위해 떠난 4000㎞’(6분)도 눈길을 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자들이 이땅을 떠나 4000㎞를 이동하면서도 지키고 간직했을 태극기를 모티브 삼아 작가는 당시 임시정부가 처한 상황과 머나먼 노정을 그려냈다. 영상의 움직임이 거울에 반사돼 대칭의 모양으로 완성되는 작품으로 관람객이 바닥 영상을 따라 걸으며 체험할 수 있다.
건물 야외 상징 공간에는 작품 ‘역사의 파도’가 설치돼 있다. 이배경 작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가장 잘 표현하는 소재로 ‘피도’ 를 떠올렸고 조형물과 함께 AR로도 만날 수 있다.
/서울=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4m높이의 담장 주위를 걸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담장에 접한 10m 높이의 감시탑도 눈에 보인다. 보통 사람의 삶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을 장소 형무소. 책과 영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형무소 안으로 발길을 옮기며 많은 생각을 한다.
1908년 일제가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서울 서대문형무소는 이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1945년 해방까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곳이고 해방 이후에도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민주인사들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던 곳이다.
먼저 들른 곳은 형무소를 관리하기 위해 간수들이 업무를 보았던 보안과 청사를 그대로 활용한 전시관이다.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1908~1987)을 주제로 형무소의 시대별 변천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3개의 전시실로 나뉜 ‘민족저항실’은 대한제국 말기 의병부터 1945년 해방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항일 독립운동가들과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 수형기록표(왼쪽)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옥사. |
지하 고문실로 내려가는 발길은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독립운동가를 취조하였던 공간인데 수감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아 ‘지하 고문실’이라 불렸고 생존 애국지사의 육성 증언이 전시돼 있다.
수감자들이 실제 투옥됐던 건물인 옥사에 들어선다. 2층 벽돌 구조로 총 46개의 감방이 배치돼 있는 12옥사. 빛이 차단돼 ‘먹처럼 깜깜하다’고 해 일명 ‘먹방’으로 불렸던 2.4㎥ 넓이의 징벌방에 들어서자 숨이 막힌다. 또 다른 옥사에서는 민주 인사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문익환 목사, 이돈명 변호사 등 엄혹한 시대에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이들을 소개하는 곳이다.
그밖에 수감자들이 노역을 했던 공장 건물인 공작사, 간수들이 수감자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근무했던 공간인 중앙사,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을 따로 격리·수용했던 한센병사 등도 보인다.
여성 미결수가 수감되었던 여옥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망루 앞 여옥사 8호 감방은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어윤희·권애라·신관빈·심녕철·임명애 등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던 곳이다. 특히 감방 안에 세워진, 동덕여고 동기생 이효정(1913~2010) 박진홍(1914~미상)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서로 생사를 모르다 1935년 옥사에서 만난 그들이 두 손을 맞잡고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 뭉클하다. 서대문형무소에 다섯번이나 수감됐던 박진홍은 마지막 수감 땐 임신 상태였고, 감옥에서 키웠던 아이 이름은 ‘철창이 한이다’란 뜻의 철한(鐵恨)이었으나 두 해를 못 넘겨 사망했다.
형무소 맨 안쪽에는 사형장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는 ‘통곡의 미루나무’가 서 있다. 사형장으로 들어가기 전 사형수들이 원통한 마음에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는 유래가 전해지는 슬픈 나무다. 2020년 8월 100여년의 수령으로 쓰러졌는데, 사형장의 역사와 함께 한 통곡의 미루나무를 기억하기 위해 쓰러진 나무를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1층 목조건물로 이뤄진 사형장은 을씨년스럽다. 마치 무대처럼 보이는, 커튼이 쳐진 공간에 목을 매다는 밧줄과 나무의자가 놓여있다. 일제강점기부터 1987년 서울구치소 이전까지 실제 사형이 집행됐던 건물로 사형후 시신을 바깥 공동묘지로 이동하기 위해 외부와 연결해 둔 비밀통로 시구문도 눈길을 끈다.
12옥사 붉은 벽돌 담장엔 대형 태극기가 당당히 걸려 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역사의 현장과 그 때의 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의미처럼 보인다.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 전시된 태극기. |
‘대한민국, 여기서 시작하다’
지난 3월 개관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으로 향하는 지하철 역사에 새겨진 글귀다. 대한민국의 건립과 민주공화정의 시작을 보여주는 임시정부기념관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어 함께 관람하면 좋다.
3개 층에 꾸져진 상설전시관은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인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27년간 정부로서 활동한 과정을 들여다보는 ‘군주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대한민국 국회의 시초인 임시의정원의 의회활동과 정당을 살펴보고 임시정부를 도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람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로부터 ‘헌법’과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와 국호·연호, 국가의 상징과 기념일 등을 이어받은 과정을 만날 수 있는 ‘임시정부에서 정부로’ 등이다.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바로 ‘그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된 배경을 보여주는 파노라마 작품은 인상적이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집에 모인 독립운동가 29명이 10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치열한 회의를 거쳐 대한제국을 잇는다는 뜻에서 ‘대한’을, 주권을 국민이 가진다는 의미에서 ‘민국’을 택해 대한민국을 국호로 삼는다.
1946년 3월1일 제 27회 기념식에서 행해진 조소앙 임시정부 외무부장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우리나라를 독립국으로 하오리다. 우리 동포로 하여금 자유민이 되게 하오리다(중략) 그렇지 못하게 되면 나의 몸을 불에 태워죽여라. 대한독립만세! 임시정부 만세’라 외치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또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의 빛바랜 사진, 한·중·영문 애국가 악보, 상하이에서 체포 위기에 몰린 김구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켜 무사히 피신시킨 피치 목사 가족의 모습 등 귀한 자료들이 많다.
한계륜 작가의 대형 미디어 작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길-돌아오기 위해 떠난 4000㎞’(6분)도 눈길을 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자들이 이땅을 떠나 4000㎞를 이동하면서도 지키고 간직했을 태극기를 모티브 삼아 작가는 당시 임시정부가 처한 상황과 머나먼 노정을 그려냈다. 영상의 움직임이 거울에 반사돼 대칭의 모양으로 완성되는 작품으로 관람객이 바닥 영상을 따라 걸으며 체험할 수 있다.
건물 야외 상징 공간에는 작품 ‘역사의 파도’가 설치돼 있다. 이배경 작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가장 잘 표현하는 소재로 ‘피도’ 를 떠올렸고 조형물과 함께 AR로도 만날 수 있다.
/서울=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