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역사는 미래의 사안이다-김재인 철학자·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2022년 05월 10일(화) 00:15
서양 근대는 인류에게 소중한 여러 가치를 일깨우고 또 성취했다. 자유·평등·유대 등 기본 권리의 쟁취, 민주 공화정이라는 정치 체제를 지향한 혁명, 과학적 사고를 통해 이룩한 기술 문명 건설 등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 바탕에 짙은 부정적 그림자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식민주의, 시장 만능 자본주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를 꼽을 수 있다. 이것들이 서양 근대를 떠받치고 있는 공리의 집합, 즉 공리계다.

그런데 이 공리들은 서양 근대의 성취와 가치라는 빛의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다. 그것들은 그림자를 은폐하는 빛이었다. 이 점에서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고, 지금 시대에 어떤 것들을 되살려야 하는지 실험해야 한다. 서양 근대를 넘어 지구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탈근대 가치 시스템이 절박하다. 이는 식민주의로부터의 원상복귀를 지향하는 탈식민주의, 시장과 원자적 개인을 넘어 인류가 공동으로 누려야 할 마땅한 몫의 회복 같은 주제로 이어져야 한다.

그중 식민주의 문제를 들여다보자. 손쉽게 ‘역사보다 미래’를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 수구세력이 내세우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이들은 역사 청산 문제를 한일 관계로 좁힌다. 하지만 자칭 진보 세력도 문제의 범위를 오해해서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보 담론도 좁은 시야에 갇힌 셈이다. 역사 청산 문제는 200년 넘게 이어져 온 식민주의의 관점에 도전하는 탈근대 담론의 핵심이다. 식민주의 전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일 관계 문제라고 축소하면 안 된다.

식견이 부족해서인지 몰라도 이 문제를 국가 단위에서 이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다른 사례는 없다. 식민지 경험을 딛고도 오늘날 이 정도 힘을 갖춘 나라가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한국이 역사 청산을 계속 외칠 수 있다는 건 정의의 관점에서 자랑스러운 일이다. 우선 국력의 징표이기 때문이며, 또한 과거 식민 지배를 당했던 모든 지역을 대표해 외치는 진보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힘이 없거나 자신이 없어서 외칠 수 없는 자들에게 힘을 주고 자신감을 주는 행위는 퇴행적이라고 비판받을 문제가 아니다.

한 걸음 더 가 보자. 서양 근대 사상은 식민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거듭 강조해야 할 문제인데, 과거에도 오늘에도 식민주의를 반성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이를 실천하는 서양 사상가나 정치인은 별로 없다. 프란츠 파농처럼 식민지 경험을 한 사상가의 목소리만 드물게 확인된다. 현재의 부강이 과거 식민 지배의 결실임을 모르는 이 없건만, 저들은 뻔뻔하게도 자유와 인권과 평화를 외친다.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시장이 합리적으로 결정하니 모든 걸 시장에 맡기자는 논리도 현재의 세계 질서를 낳은 식민주의를 은폐한다. 시장 논리는 힘을 통해 이미 판을 장악한 자들이 내세우는 가짜 공정성 주장이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이후에, 공정한 경쟁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부강의 질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편성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달라진 체급 아래 경쟁은 무의미하다.

역사 청산을 부정하는 목소리는 현재의 지배자한테서 나온다. 현재의 지배자는 과거를 지배함으로써 미래를 지배하려 한다. 역사 청산은 식민주의 청산이며, 근대 가치의 전환이며, 지금 여기의 힘 대결이다. 미래를 위한 투쟁은 항상 과거를 소재로 벌어졌다.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미래를 장악한다.

철학은 가치를 다루고, 가치 창조를 말한다. 서양 근대의 가치 목록을 문제 삼지 않고서, 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없다. 패권자의 논리가 정당성 담론조차 뭉개고 가는 마당에는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