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 대사 - 윤영기 정치·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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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 대사 - 윤영기 정치·경제담당 에디터
2025년 09월 08일(월) 00:00
벽암 대사(碧巖大師·1575∼1660)는 구례 화엄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고승이다. 법명은 각성(覺性)이고 벽암(碧巖)은 호다. 화엄사는 임진·정유재란 당시 가람이 소실되고 석경(石經 )이 파손되는 등 큰 재난을 당했다. 화엄사에 머물던 벽암 대사는 대웅전을 비롯해 여러 가람을 중창하거나 신축했다.이 때 대웅전, 명부전, 보제루, 천왕문, 일주문 등 산문 체계를 구성하는 핵심구역이 중창됐다.

벽암 대사는 하동 쌍계사, 완주 송광사, 보은 법주사의 중건·중창도 주도했다. 그는 조선 후기 불교사 뿐만 아니라 불교 미술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승려 장인을 길러내 승려 장인시대를 연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17세기에 제작된 불교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 대다수는 벽암이 주도한 불사에서 그가 길러낸 승려 장인들에 의해 제작됐다’고 평가한다.

벽암 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의승병으로 해전에 참여했다. 인조가 승군조직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하자 1624년부터 1627년까지 3년 동안 의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지었다. 인조는 남한산성 축성 공로로 벽암 대사에게 보은천교원조 국일도 대선사(報恩闡敎圓照 國一都 大禪師)라는 칭호를 내렸다. 벽암 대사는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3000여명의 항마군(降魔軍)을 모집하고 남한산성으로 출정했으나 인조의 항복 소식에 회군하기도 했다. 무주 적산산성 사고(史庫) 수호 임무를 주관하는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 직을 맡기도 했다.

벽암은 1660년 구례 화엄사에서 세수 86, 법랍 72세로 입적했다. 제자들이 1663년 높이 4m에 달하는 벽암대사비를 화엄사 금강문(金剛門) 앞에 세웠다. 비문은 당대 유력자였던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글씨는 명필이자 형조판서를 지낸 오준(吳竣)이 썼다. 국가유산청이 최근 ‘구례 화엄사 벽암대사비’를 보물로 지정했다. 요즘 윤석열 전 대통령과 얽힌 종교인은 물론이고 무속인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새삼 벽암의 나라사랑과 실천적인 종교인의 삶이 그립다.

/윤영기 정치·경제담당 에디터 penfoot@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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