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능해(他人能解)의 정신이 안겨 준 교훈 - 이동범 수필가·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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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면서 독거노인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 약자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어 이웃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에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들을 돕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한 면이 있다고 본다.
우리 선인들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누구나 열 수 있다’는 뜻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당신을 이해한다는 공감과 타인을 향한 배려가 자연스럽게 배어난다.
6월은 24절기 가운데 9번째 해당하는 망종(芒種)이 있는 달이다. 망종은 일 년 중 논보리나 벼 등 곡식의 씨를 뿌리기에 가장 좋은 날이다. 보리를 수확하며 굶주림의 시기였던 ‘보릿고개’를 살아서 넘기게 되는 것이다.
‘보릿고개’ 시기에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목조기와집 ‘운조루’이다. 조선 후기의 누정 운조루는 조선 영조 때 낙안 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영조 25년(1776)에 지었다. 고택 운조루에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곡식이 닷섬(200kg) 들어가는 커다란 뒤주를 두고 곡식을 꺼낼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그 위에 ‘타인능해’라고 적어 두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운조루에서 곡식을 먹을 만큼 꺼내가라는 표시였다.
류이주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나눔의 미덕을 가르쳤고 타인능해 뒤주에 곡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살피라고 일러두었다. 받은 사람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이 뒤주가 있는 곳에는 안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서 바로 가난한 자의 등불 즉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정신을 발휘하였다고 본다.
이곳은 격변의 시기를 보낸 곳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 때는 가난한 백성들의 항쟁이, 1948년 여순사건 때는 이념으로 대립했다. 흔히 지주들은 소작인에게 착취와 수탈을 강요했지만 운조루는 나눔과 분배의 타인능해 정신으로 생활한 덕분에 변란에도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운조루 주변 백성들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들고 지쳤어도 운조루에서 배운 타인능해의 넉넉한 인심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겼을 것이다.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운조루의 굴뚝이다. 운조루에는 울타리 높이 이상으로 쌓아올린 굴뚝이 없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게 섬돌 아래에 숨어 있었다. 쌀 등의 곡식이 없어서 끼니를 이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밥짓는 연기는 얼마나 부러운 일이며 배가 더 고프게 만드는 일이기에 연기가 울타리 너머로 멀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였다.
타인능해의 정신은 대대로 문화 류씨 종손에게 이어지면서 230년이 지난 지금도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옛 선인들의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일깨워준 또 한 예로 경주 최부잣집이 있다. 경주 최부잣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 오랜 기간 칭송을 받아오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지어 입히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큰 솥에선 매일같이 음식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경주 인근의 주린 자들은 최부잣집을 찾았다. 이렇듯 최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3분의 1은 자신들이, 3분의 1은 과객의 접대에, 3분이 1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과 경주 교동 교촌댁의 ‘지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의 정신은 우리가 잊었던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일깨워 준 좋은 본보기이며 교훈이다.
문화 류씨와 경주 최씨 후손들의 삶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과 마음가짐을 배울 때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必有餘慶)’란 옛 성인들의 베풂의 철학을 이어받은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누면 반드시 행복이 오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됨을 알고 살아가면 좋겠다.
우리 선인들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누구나 열 수 있다’는 뜻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당신을 이해한다는 공감과 타인을 향한 배려가 자연스럽게 배어난다.
‘보릿고개’ 시기에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목조기와집 ‘운조루’이다. 조선 후기의 누정 운조루는 조선 영조 때 낙안 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영조 25년(1776)에 지었다. 고택 운조루에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곡식이 닷섬(200kg) 들어가는 커다란 뒤주를 두고 곡식을 꺼낼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그 위에 ‘타인능해’라고 적어 두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운조루에서 곡식을 먹을 만큼 꺼내가라는 표시였다.
이곳은 격변의 시기를 보낸 곳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 때는 가난한 백성들의 항쟁이, 1948년 여순사건 때는 이념으로 대립했다. 흔히 지주들은 소작인에게 착취와 수탈을 강요했지만 운조루는 나눔과 분배의 타인능해 정신으로 생활한 덕분에 변란에도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운조루 주변 백성들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들고 지쳤어도 운조루에서 배운 타인능해의 넉넉한 인심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겼을 것이다.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운조루의 굴뚝이다. 운조루에는 울타리 높이 이상으로 쌓아올린 굴뚝이 없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게 섬돌 아래에 숨어 있었다. 쌀 등의 곡식이 없어서 끼니를 이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밥짓는 연기는 얼마나 부러운 일이며 배가 더 고프게 만드는 일이기에 연기가 울타리 너머로 멀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였다.
타인능해의 정신은 대대로 문화 류씨 종손에게 이어지면서 230년이 지난 지금도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옛 선인들의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일깨워준 또 한 예로 경주 최부잣집이 있다. 경주 최부잣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 오랜 기간 칭송을 받아오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지어 입히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큰 솥에선 매일같이 음식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경주 인근의 주린 자들은 최부잣집을 찾았다. 이렇듯 최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3분의 1은 자신들이, 3분의 1은 과객의 접대에, 3분이 1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과 경주 교동 교촌댁의 ‘지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의 정신은 우리가 잊었던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일깨워 준 좋은 본보기이며 교훈이다.
문화 류씨와 경주 최씨 후손들의 삶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과 마음가짐을 배울 때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必有餘慶)’란 옛 성인들의 베풂의 철학을 이어받은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누면 반드시 행복이 오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됨을 알고 살아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