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지 않아서, 그는…
  전체메뉴
책을 읽지 않아서, 그는…
김형중 조선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문도시광주위원회 위원장
2025년 04월 28일(월) 00:00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 지 벌써 30년쯤 되어 간다. 그 세월을 그래프로 그리면 점진적인 하향곡선 하나가 그려질 듯도 싶다. 젊은 날의 호기는 점차 사라져, 세월이 지날수록 나는 강의실에서 목청 높여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세상은 갈수록, ‘사람다운 삶’을 생각할 여유도 필요도 없는 방식으로 돌아갔고, 그러는 와중에 인문학은 그저 스펙, 취미, 여가 정도로 취급당하기 일쑤였으니까.

인문학은 이제 치유, 힐링, 웰빙 같은 신종 접두어를 붙이지 않고서는 그 존재 가치 자체가 부정당할 참이었다. 그래서 이즈음에는 신학기 첫 시간을 “제 과목은 취업에도 스펙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수업을 해서 미안합니다”란 말로 시작하곤 한다. 말하자면 나는 반인문학적인 시절에 주눅 들어 있었던 셈이다.

상황이 일변한 것은 작년 10월이었다. 멀리 스웨덴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날아들었다. 언론도 출판계도 심지어 문학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일반인들까지 난리가 났다. 한강의 책들은 수백만 권이 팔려나갔고 덕분에 나 역시 일평생 가장 바쁜 두 달을 보냈다. 인터뷰, 기사, 강연 요청이 쇄도했고, 인문학 부흥을 위한 광주시 차원의 ‘인문도시광주위원회’가 발족되었고, 그 위원장 일을 맡아 지금도 수행 중이다. 그사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친위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그래서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는 범국민적 흐름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기뻤다. 특히나 젊은 시위 참가자들이 응원봉과 ‘소년이 온다’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장면을 볼 때는 감동에 몸을 떨기도 했는데 그럴 때 내 마음이 이랬다. “여전한 문학의 힘인가!”, “으메 기 살아!”.

몽상적이지만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있다. “도대체 윤석열은 왜 저런 짓을 저지른 걸까?” 심리학자라면 그의 편집증을 문제삼을 수 있겠다. 역사학자라면 “한국 현대사의 오랜 질곡이 낳은 괴물”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학 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가 한강을 읽지 않아서”라고 답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강’의 자리에 그냥 ‘책’을 놓아도 상관없다. 좋은 책과 오래 벗한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또 그렇게 행동할 수도 없다. 좋은 책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눈으로 또한 나를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윤석열이 저 모양이 된 이유를 “책을 읽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해도 큰 오류는 없다. 망상과 편집증이란 “자기 비판에서 면제된 사유”를 일컫는다. 그리고 자기비판이야말로 인문학이 우리에게 항상 강조하는 사유의 겸손이다. 그러니까 그는 책을 읽지 않아서 그리되었다. 한 번쯤 설문조사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인)문학적 독서가 시민의식의 수준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통계 조사” 같은…….

물론 나 역시 바보는 아니어서 한 권의 책이나 한 번의 사건이 세상을 일거에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식의 낙관은 거절한다. 사석에서는 앞으로 2년 내 중고 시장에 가장 많이 나올 책은 한강의 책들일 것이라고 말하고 다니기도 하는데, 한강을 읽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강은 고통을 전하는 작가지 섣부른 낙관과 화해를 전하는 작가는 아니다. 태반이 읽다가 후회하거나 중단할 줄 나도 안다. 갑작스러운 문학 붐도 곧 식을 것이고, 수능식 문학 교육은 여전히 지속될 것이고, 나는 다시 새 학기마다 “이런 걸 가르쳐서 미안합니다”라며 강의를 시작하게 될 줄도 안다.

그러나 나는 또 얼마간 바보이기도 한데 이런 사건들이 한 번 두 번 일어날 때마다 세상이 조금씩은 변할 거란 믿음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책으로 묶여 나온 수상 소감문 ‘빛과 실’에서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연결하는 고통이다”, 그리고 “언어는 연결하는 실이다”. 그에게 사랑은 고통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결은 ‘언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언어는 실이다.

나는 그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 이제 한 차례 기쁜 소동을 겪었으니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이런 걸 가르쳐서 미안합니다‘만’……”으로 시작하는 쓸모없고 꼰대 같은 이야기들을 줄창 늘어놓을 작정이다.

핫이슈

  • Copyright 2009.
  • 제호 : 광주일보
  • 등록번호 : 광주 가-00001 | 등록일자 : 1989년 11월 29일 | 발행·편집·인쇄인 : 김여송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4(금남로 3가 9-2)
  • TEL : 062)222-8111 (代) | 청소년보호책임자 : 채희종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주일보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