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되짚어 본 광주·전남 아·태전쟁 유적] 미곡·면화·토지 세계 최대 규모 수탈…‘목포의 눈물’ 근원
[물자 운송의 거점 ‘목포’]
영산강·서남해 만나는 합수지…대륙 침략·물자 이송 등 편의성 높아
남아있는 ‘옛 목포영사관·동양척식주식회사’ 수난사 대표 상징 건물
반출됐던 쌀, 1911년 10만여석에서 1929년에는 90만여석으로 늘어
나주평야 등 토지 갈취해 대규모 농장…군수물자 만들려 식기 빼앗기도
영산강·서남해 만나는 합수지…대륙 침략·물자 이송 등 편의성 높아
남아있는 ‘옛 목포영사관·동양척식주식회사’ 수난사 대표 상징 건물
반출됐던 쌀, 1911년 10만여석에서 1929년에는 90만여석으로 늘어
나주평야 등 토지 갈취해 대규모 농장…군수물자 만들려 식기 빼앗기도
![]() 목포가 개항되면서 주한일본공사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목포 일본영사관을 개설했다. 목포부청, 등 중요 기관으로 쓰였던 이 공간은 현재 목포근대역사관 제1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목포는 영산강과 서남해가 만나는 합수지(合水地)이자 미곡과 면화, 소금 등을 수탈하던 호남지방의 기착지(寄着地)였다.
그런 까닭에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목포를 수탈의 요처이자 물자 운송의 첨병으로 낙점했다.
옛 목포영사관(현 목포근대역사관 제1관)과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제2관)은 목포에서 이뤄진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목포지점은 세계 여러 동척 지점 중 가장 많은 양의 물자를 수탈해 갈 만큼 일제강점기와 아·태전쟁 수난사의 상징이다.
동척은 일본이 ‘척식’(국외 영토를 개척해 자국민 이주와 정착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치한 회사로, 당초 경성(현 서울)에 본사를 두고 시작했으나 일본 도쿄로 본점을 옮기고 각지에 지사를 두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194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는 10개(경성, 부산, 대구, 이리, 대전, 원산, 사리원, 평양, 나진 등)를 운영했다.
동척 목포지점은 본래 1909년 나주 영산포에 설립, 1920년 4월 지점으로 승격된 뒤 6월 1일자로 목표로 옮겨온 것이다.처음에는 소작료 수탈을 주로 했으나 아·태전쟁이 벌어진 1940년대 들어서는 식민 경영에 필요한 사업 자금지원으로 목적이 바뀌었다.
아·태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조선총독부 예산의 많은 부분을 일본 정부가 제공했지만, 전시에는 그것조차 어려워져 ‘조선에서 알아서 수급하라’는 지침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아·태전쟁을 위한 군량미로 많은 수의 쌀이 강탈당했다.
조선총독부는 산미 증식 계획을 수립하고 1940년에는 식량배급조합, 1943년에는 조선식량영단을 설치해 쌀의 공출과 배급을 본격 관리했다.
총독부와 농림국, 조선 미곡 요람 등 기록에 따르면 1928년 미곡 생산량은 총 1729만8000여 석, 1930년 1351만1000여 석이었다. 그중 일제는 각각 740만5000여 석, 542만6000여 석을 수탈했다. 1930~1940년 자료는 문헌에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지만 민족말살정책과 총동원령이 내려졌던 터라, 전문가들은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목포항에서 일본으로 실려 간 쌀만 해도 1911년 10만여 석에서 1914년 35만여 석, 1919년 40만여 석으로 상승했다. 1925년에는 50만여 석, 1927년 80만여 석이었으며 1929년 90만여 석으로 뛰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측이 2003년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미곡류 수탈액은 총 1849억 3292만엔(圓)이었으며 맥류는 4억767만엔이었다.
목포는 면화 수탈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04년 이후 목포에 부임한 일본 영사 와카마츠 도사부로가 목포 앞 고하도에서 육지면 시험 재배에 성공했다.
이후 1906년부터 통감부는 면화 재배의 모든 권한을 일본 면화 재배 협회에 위탁, 한국 농민들의 비협조에도 면화 재배를 지속했다.
오늘날 목포근대역사관에 있는 육지면발상지비는 목포 고하도에서 육지면 시범 재배를 성공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대일배상요구조서에 따르면 면화 공출액은 9억8402만엔, 조사에 의한 수탈액은 23억3628만엔에 달했다.
일본은 양곡, 면류뿐 아니라 목포의 토지 자체도 수탈의 대상으로 봤다.
목포 주변과 영산포를 중심으로 한 나주평야에서 토지를 헐값으로 매입하거나, 총독부가 매각한 황무지를 사 개간하거나, 고리대금을 빌려주고 저당된 토지를 빼앗는 방식으로 토지를 대규모로 모아 나갔다.
목포와 나주 일대에는 대규모 농장이 그렇게 들어섰다. 1930년부터 전남 지방에는 500정보(1 정보는 1만여㎡) 이상의 토지 소유자 1위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으로 총 7143정보에 달하는 땅을 보유했다.
2위는 조선실업주식회사가 3084정보, 3위는 동산농사주식회사가 1604정보였으며 조선흥업주식회사(1058정보), 겸전산업주식회사(992정보), 합자회사금곡상회(963) 등이 뒤를 이었다. 이외 개인을 포함한 총 15명(기관)이 전남의 2만938정보 토지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아·태전쟁 시기에는 총알 등 군수물자를 만들기 위해 놋쇠그릇 등 그릇류를 집마다 빼앗아 가기도 했다. 1940년대에는 유기(놋그릇)로 된 식기마저 강제로 공출, ‘결전(決戰)’이라는 문구를 쓴 대용품 도자기를 배부했는데 일부가 전시관에 보존돼 있다.
나아가 일제는 인적 자원도 수탈했다.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시기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전쟁에 동원한 것이다. 1938년 육군 특별 지원병, 1943년 해군 특별 지원병 모집에 이어 1944년 징병제를 통해 조선인들을 군대로 불러들였다. 목포의 청년과 학생들은 무안 망운 비행장이나 고하도 동굴 공사에 동원됐으며, 1939년 8월 목포부에서는 매월 15일을 반공방첩의 날로 정해 방공 훈련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1945년 6월에는 미군 상륙에 대비해 일반인들을 분산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는 “민중들은 결기했을 때에도 조선총독부보다 각지의 경제수탈 중심지를 쫓아갔을 만큼 이들 공간은 수탈사의 표상이다”며 “고통이 담긴 공간을 보존하면서도 역사적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하는 것이 후손에게 남겨진 과제다”고 덧붙였다.
/목포 글·사진=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그런 까닭에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목포를 수탈의 요처이자 물자 운송의 첨병으로 낙점했다.
옛 목포영사관(현 목포근대역사관 제1관)과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제2관)은 목포에서 이뤄진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동척은 일본이 ‘척식’(국외 영토를 개척해 자국민 이주와 정착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치한 회사로, 당초 경성(현 서울)에 본사를 두고 시작했으나 일본 도쿄로 본점을 옮기고 각지에 지사를 두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194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는 10개(경성, 부산, 대구, 이리, 대전, 원산, 사리원, 평양, 나진 등)를 운영했다.
아·태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조선총독부 예산의 많은 부분을 일본 정부가 제공했지만, 전시에는 그것조차 어려워져 ‘조선에서 알아서 수급하라’는 지침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아·태전쟁을 위한 군량미로 많은 수의 쌀이 강탈당했다.
조선총독부는 산미 증식 계획을 수립하고 1940년에는 식량배급조합, 1943년에는 조선식량영단을 설치해 쌀의 공출과 배급을 본격 관리했다.
![]()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현 목포근대역사관 제2관) 전경. |
총독부와 농림국, 조선 미곡 요람 등 기록에 따르면 1928년 미곡 생산량은 총 1729만8000여 석, 1930년 1351만1000여 석이었다. 그중 일제는 각각 740만5000여 석, 542만6000여 석을 수탈했다. 1930~1940년 자료는 문헌에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지만 민족말살정책과 총동원령이 내려졌던 터라, 전문가들은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목포항에서 일본으로 실려 간 쌀만 해도 1911년 10만여 석에서 1914년 35만여 석, 1919년 40만여 석으로 상승했다. 1925년에는 50만여 석, 1927년 80만여 석이었으며 1929년 90만여 석으로 뛰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측이 2003년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미곡류 수탈액은 총 1849억 3292만엔(圓)이었으며 맥류는 4억767만엔이었다.
목포는 면화 수탈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04년 이후 목포에 부임한 일본 영사 와카마츠 도사부로가 목포 앞 고하도에서 육지면 시험 재배에 성공했다.
이후 1906년부터 통감부는 면화 재배의 모든 권한을 일본 면화 재배 협회에 위탁, 한국 농민들의 비협조에도 면화 재배를 지속했다.
![]() 일본이 중일전쟁 이후 유기(놋그릇)로 된 식기를 강제 공출한 뒤 대용품으로 사용하도록 한 도자기 식기(왼쪽). 표면에는 총력전을 결기하는 의미에서 ‘결전’이라고 쓰여 있다. |
오늘날 목포근대역사관에 있는 육지면발상지비는 목포 고하도에서 육지면 시범 재배를 성공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대일배상요구조서에 따르면 면화 공출액은 9억8402만엔, 조사에 의한 수탈액은 23억3628만엔에 달했다.
일본은 양곡, 면류뿐 아니라 목포의 토지 자체도 수탈의 대상으로 봤다.
목포 주변과 영산포를 중심으로 한 나주평야에서 토지를 헐값으로 매입하거나, 총독부가 매각한 황무지를 사 개간하거나, 고리대금을 빌려주고 저당된 토지를 빼앗는 방식으로 토지를 대규모로 모아 나갔다.
목포와 나주 일대에는 대규모 농장이 그렇게 들어섰다. 1930년부터 전남 지방에는 500정보(1 정보는 1만여㎡) 이상의 토지 소유자 1위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으로 총 7143정보에 달하는 땅을 보유했다.
2위는 조선실업주식회사가 3084정보, 3위는 동산농사주식회사가 1604정보였으며 조선흥업주식회사(1058정보), 겸전산업주식회사(992정보), 합자회사금곡상회(963) 등이 뒤를 이었다. 이외 개인을 포함한 총 15명(기관)이 전남의 2만938정보 토지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 조선총독부에서 검사한 쌀 30kg을 담았던 포대. |
아·태전쟁 시기에는 총알 등 군수물자를 만들기 위해 놋쇠그릇 등 그릇류를 집마다 빼앗아 가기도 했다. 1940년대에는 유기(놋그릇)로 된 식기마저 강제로 공출, ‘결전(決戰)’이라는 문구를 쓴 대용품 도자기를 배부했는데 일부가 전시관에 보존돼 있다.
나아가 일제는 인적 자원도 수탈했다.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시기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전쟁에 동원한 것이다. 1938년 육군 특별 지원병, 1943년 해군 특별 지원병 모집에 이어 1944년 징병제를 통해 조선인들을 군대로 불러들였다. 목포의 청년과 학생들은 무안 망운 비행장이나 고하도 동굴 공사에 동원됐으며, 1939년 8월 목포부에서는 매월 15일을 반공방첩의 날로 정해 방공 훈련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1945년 6월에는 미군 상륙에 대비해 일반인들을 분산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대표는 “민중들은 결기했을 때에도 조선총독부보다 각지의 경제수탈 중심지를 쫓아갔을 만큼 이들 공간은 수탈사의 표상이다”며 “고통이 담긴 공간을 보존하면서도 역사적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하는 것이 후손에게 남겨진 과제다”고 덧붙였다.
/목포 글·사진=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