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소쇄원에는 파초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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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소쇄원에는 파초가 산다
2025년 01월 16일(목) 00:00
‘Right place, wrong person(맞는 장소, 잘못된 사람)’ 가수 알엠(RM)이 2024년 발매한 솔로 앨범의 제목이다. 그는 본인이 속한 사회, 조직, 집단과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던 순간을 떠올리며 앨범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나 또한 평소 ‘나 여기 있는(있어야 되는) 거 맞아?’란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 나에겐 당연하지 않을 때, 만족하는 사람들 속에서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란 생각이 들 때, 모두가 열광하는 것에 공감할 수 없을 때…… ‘잘못된’ 나는 ‘맞는’ 다수와 동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지고 멍해진다. 맞은 건 나고 잘못된 건 다수일지라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한편 잘못된 당사자가 내가 아닌 타자일 때, 가령 ‘사람’ 자리에 ‘식물’을 대입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맞는 장소에 있는 이상한 식물’. 이 부조화는 되레 ‘이색적’ ‘특별한’ ‘힙한’이란 수식어를 달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엔 장소, 환경에 맞지 않은 식물 천지다. 서울 시내의 백화점에는 서울에 사는 식물이 아닌 멕시코 해발 500m 건조한 나뭇가지 위에 분포하는 틸란드시아가 살고, 강원도의 층고 높은 카페에는 아프리카 사막 원산인 산세베리아가 있다.

우리가 열광하는 대상은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법한 존재가 아니라 ‘왜 거기 있는 거지’ 싶은 그런 이상한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전남 담양군에 자리한 명승 제40호 소쇄원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정원이다. 이곳엔 배롱나무, 버드나무, 단풍나무 등 우리 자생식물과 오래전부터 심어져온 재배식물이 있다. 정원을 걷다 보면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식물이 있으니, 그것은 제월당 한편에 자리한 파초다. 바나나와 닮은 파초는 이국적인 모습으로 소쇄원을 비롯한 남부지역 옛 정원에 심겨지고 문학, 예술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다.

파초는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풀로, 이들이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추측건대 고려 문인들에 의해 중국에서 도입된 게 아닐까 싶다.

소쇄원에는 우리나라 자생식물뿐만 아니라 매실나무, 복사나무, 치자나무 등 중국 원산의 식물이 다수 심어져 있다. 파초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파초를 본 사람들은 말한다. “ 이거 바나나인가?” 파초와 바나나는 파초과 파초속으로 언뜻 보아 닮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격도 형태도 다르다. 열대식물인 바나나는 우리나라 노지에 살 수 없지만, 온대 식물인 파초는 영하 15도까지 견딜 수 있어 우리나라 남부지역 노지에서 재배된다. 둘은 열매의 형태도 비슷하다. 다만 파초가 바나나보다 결실성도 떨어지고, 열매도 가늘고 맛이 떫어 식용하지 않는다.

대신 파초는 바나나와 닮은 이국적인 너른 잎을 무기로 관상용 화훼식물로 사랑받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풀이지만 나무처럼 크게 자라는데다 커다란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운치 있고, 빗방울이 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고운 파초에 매료되어 정원에 심었다. 덕분에 파초는 옛 풍경화와 정물화뿐만 아니라 인물화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식물이 되었다. 이국적인 식물을 통한 옛사람들의 과시욕을 엿볼 수 있다.

소쇄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오래된 절에는 파초가 많다. 지난 여름 순천 송광사에서도 너른 잎의 파초를 만났다. 파초는 절에 심기는 단골 식물이다. 불교에서 이들은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식물의 줄기를 감싸고 나오는 잎을 엽초라 하는데, 파초의 엽초는 중첩되어 줄기처럼 곧게 자란다. 이것은 줄기 아닌 가짜 줄기다. 이 가짜 줄기에 빗대어 불교에서는 파초가 인간사의 무상, 육신의 덧없음을 가리키는 식물이 되었다.

이렇듯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탐미의 대상으로 정원에 파초를 심고 문학, 예술 작품에 파초를 등장시켰다. 불교에서 파초는 육신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식물로 절에 심어졌다.

탐미의 대상이자 덧없음의 상징인 파초. 극과 극의 두 의미 중 무엇이 파초의 본질에 가까울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 식물에 과하게 의미 부여해온 덕분에 파초는 멀리 또 많이 번식하고 번영했다는 것이다. 시실 파초로서는 이것이면 됐다.

<식물 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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