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다시 주먹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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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다시 주먹밥이다
2025년 01월 09일(목) 00:00
윤석열 내란 사건으로 촉발된 시민의 시위가 지속되고 있다. 국회에서 부결된 양곡관리법 등의 문제로 농민단체의 트랙터 서울 진입 투쟁도 이어졌고, 온갖 정치사회적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나와 지금 한국은 거대한 열광에 휩싸여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분노와 고통의 외침이고 변혁을 바라는 절실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현대적인 시위 전통을 가장 오래 가지고 있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이 아닐까 싶다.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유럽도 반세계화 시위로 한때 거대한 흐름을 이어갔지만 이제 그 광휘를 구경하기 힘들다. 민중은 자본에 예속되어 가고 있고, 세상은 점점 더 살만한 땅이 아니다.

한국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시위의 동력과 연대를 잃지 않고 있다. 최근의 대 정부 투쟁 연대기만 살펴보아도 명박산성 투쟁, 반 박근혜 투쟁(그리고 백남기 선생의 타살 사건을 빼놓으면 안 된다), 잠깐 쉬어가는 듯 하더니 기어이 생각지도 못하게 대통령의 내란 시도로 나라가 거의 절단할 지경에 처했다. 시민은 광장으로, 다시 체포영장을 집행하려는 한남동 관저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시위의 경험을 잊을 만하면 다시 꺼내들어야 하는 가장 괴로운 국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처지에서 시민들과 민중의 가슴 따뜻하고 거의 소름 끼칠 정도로 가슴 저미는 연대의 정을 나누는 미담은 끝이 없다. 한남동 근처는 별다른 빌딩이 없어 화장실도 없다. 이때 콘벤투엘 수도회에서 기꺼이 사람들에게 화장실을 개방하고 더운 물을 제공하고 있다. 명동성당의 신화와 좌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수도원의 수고는 가슴이 미어지는 사랑의 기억을 남겨주고 있다.

지난 호에 썼지만, 선결제의 온정과 동지적 연대는 이미 일상이 되었다(여의도를 거쳐 광화문-드디어 한남동 일대, 나아가 대형사고가 난 무안공항에서도 생생히 빛난다). 김밥이 돌아다니고 핫팩과 보온도구들, 커피와 음료를 나눈다. 지난 호에 선결제는 유럽에서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민 부조정신이라고 썼는데, 알고보니 우리에게 이미 엄청난 금자탑이 있었다. 바로 광주항쟁 당시 금남로의 주먹밥과 김밥 함지박이 그것이다. 누군가 이 얘기를 되살려내어 선언적으로 인터넷에서 올렸고, 사람들은 당대의 싸움이 바로 5·18에서 이어지는 민중항쟁의 연장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들 울었다.

유럽이 반세계화 시위로 싸워나갈 때 한 인물이 주목받았다. 대학교수 경험이 있고, 두 개의 박사학위가 있는 밤 카트(Wam Kat, 정식 이름은 피터 얀 프레데릭 밤 카트.1956년생)라는 사람이다. 그는 자원자들을 조직, 스프와 샌드위치 같은 뜨거운 즉석음식을 시위현장에서 만들어 시위대에게 제공함으로써 크게 화제를 모았다. 물론 공짜였다. 그는 이미 사회운동가로 유명했는데, 점잖게 훈수(?) 두는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더운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일을 기꺼이 맡았다. 이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우리에게는 밤 카트 같은 이들이 아주 많다. 멀리 80년 광주, 그리고 수많은 노동사위현장, 나아가 팽목항의 그 막막하던 밤과 허기를 메워주던 사람들.

최근에는 ‘흑백요리사’로 유명한 광주의 안유성 셰프와 그의 친구들이 밥을 준비해서 무안공항을 찾았다. 광주에서 장사를 하는 그는 많은 광주사람들이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기꺼이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고 했다. 시위는 언젠가 끝날 것이고, 상황은 정리될 것이다. 하지만 그 빛나는 싸움 위에 누군가 온기 있는 음식 한 그릇, 방석 한 장의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훈장이 아닐까 싶다.

지금 한남동 관저 앞에는 강추위에도 얇은 비닐 한 장으로 목청 높여 싸우고 있는 시민들이 있다. 그들 사이로 뜨거운 어묵 국물을 담은 손수레가 지나다닌다. 커피 보온병이 돈다. 이 싸움은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광주의 주먹밥을 떠올리는 시간이다.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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