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것은 ‘나’의 시선일 뿐, 음악극 ‘si, Sonne!’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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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것은 ‘나’의 시선일 뿐, 음악극 ‘si, Sonne!’ 리뷰
문예위 온라인으로 보는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주준영 작…오케스트라 연주에 탭댄스, 연극 등 접목
2024년 05월 03일(금) 09:25
‘침 맞은 남자’는 단상에 올라 탭댄스, 브레이크 댄스 등을 보여준다.
공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객석에 숨어있던 배우인 ‘한 남자’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린다. 그가 실수로 앞사람의 옷깃에 가래침을 묻힌 탓, 침을 닦아주겠다고 말하지만 호의는 보란듯이 거절당한다.

‘침 묻힌 남자’는 불안에 휩싸인 채 팬터마임을 방불케 하는 오버액션을 펼친다. 그는 침 묻힌 일을 계속 걱정하며 “앞 사람이 직장 상사인 것 같다”거나 “이 일이 회사에서 소문이 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것 같다”는 등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염려한다. 편집증적 히스테리아에 가까운 이 장면 하나로 공연은 간단하게 현대사회의 단면을 투시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는 지난달 30일 저녁 온라인(네이버TV)을 통해 주준영의 음악실험 공연 ‘Si, Sonne’을 선보였다. 지난해 문예위가 공연예술창작산실 사업을 통해 발굴했던 신작으로, 공연명 ‘Si, Sonne’는 ‘그래 소리를 울려’라는 의미다.

소리 없이 침묵하는 ‘양’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양들의 침묵’ 조나단 드미 감독 식으로 답하자면 바로 ‘비겁한 인류들’이다.

공연은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안톤 체호프가 쓴 단편소설 ‘어느 관리의 죽음’을 모티브로 음악, 춤, 퍼포먼스, 연극 등 요소를 접목했으며 극 중 ‘침 뱉은 남자’는 원작의 인물 ‘체르바코프’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남자는 오케스트라 연주단 바로 앞을 기어다니는 등 전위적 퍼포먼스를 쏟아낸다. 의자 하나를 어디에선가 가져와 상념에 잠긴 채 한참을 앉아 있다. 아마도 클라리넷 연주자가 쓰던 의자였던 것 같기도. 오케스트라는 콘트라베이스 현을 긁거나 바이올린을 손으로 튕기는 피치카토 주법 등으로 불안함을 가중시켰다. 이날 공연을 온라인으로 만났음에도 불구, 날카로운 관객들의 ‘시선’이 현의 진동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음악극 ‘시선 si, Sonne!’에서 ‘침 뱉은 남자’(왼쪽)와 ‘침 맞은 남자’는 서로 대면하며 옥신각신 다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가래침을 맞은 남자는 불현듯 높은 단상에 올라 탭댄스를 추기 시작한다. 뜬금 없다. 동기나 까닭 등 그 어떤 것도 관객들에게 ‘설명’되지 않은 채로다. 그럼에도 남자의 안무는 인류에게 내재된 열망을 몸짓 언어로 형상화하려는 듯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쯤이면, 누군가가 극장에서 가래를 맞았다는 사실은 이미 잊힌 지 오래다.

남자의 춤은 악의 없어 보이지만 ‘침 뱉은 남자’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건반악기 연주자가 손뼉을 칠 때에는 부드러운 오리엔탈풍 선율도 울렸다.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도 공연장을 지배하는 감각은 오직 ‘불안’,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불안이 반복되다 보니 ‘어딘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지경이다.

춤추는 남자가 올라서 있는 단상을 바라본다. 주변에는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오마주한 것처럼 TV 여덟 대가 설치돼 있다. 한참 뒤 모니터에 비치는 글씨는 “꺼져!”. ‘TV 부처’같은 백남준 풍 자비로움은 없다. 공연은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의 ‘돌출적 결합’이 선사하는 뜻밖의 감각에 몰입하게 한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핸드폰 알람 소리, 기하학적 패턴으로 발광하는 모니터, 반도네온과 대금 등으로 재현한 남미풍 리듬과 관현악의 경쾌한 사운드도 이색적이다.

이 같은 요소들은 얼핏 상호 연관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파편적으로 나열된 것은 아닐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한 현대인들의 불안 감각을 극적 요소로 치환해 낸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시선 si, Sonne!’은 단순히 다양한 장르, 퍼포먼스를 모아 놓은 ‘콜라주’라기 보다, 나름의 동일성을 지닌 것들을 연속시켜 숨겨진 메시지를 환기시키는 ‘아상블라주’에 가까워 보인다.(회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말이다.)

결말은 어떨까. 가래침을 뱉은 남자와 아내는 탱고풍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데, 이들은 붉은 옷을 서로 ‘끈’처럼 붙잡고 춤을 춘다.

마지막 무도 뒤에 ‘침 뱉은 남자’는 잠에 들고 아내는 관객들 앞에서 방백 한다. “여보 식사하세요. 영영 잠들면 어쩌지...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또 뭐라고들 수군댈까” 어떤 연관성도 없는 수화음 같은 이 대사는, 공연의 메시지를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는 듯 하다.

높았던 콧대를 꺾고 ‘클래식 공연’의 장벽이 낮아지고 있지만, 어떤 예술작품은 선명한 ‘콧날’이 필요할 것이다. 이날 펼쳐진 음악극 ‘시선 si, Sonne!’은 몰이해의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방가르드적 음악극’이 꾸준히 시도되어야 하는 근거로 다가왔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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