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총선의 반란 - 임동욱 선임기자·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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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총선의 반란 - 임동욱 선임기자·이사
2023년 05월 23일(화) 22:00
지난주 태국 정치권에선 ‘유쾌한 반란’이 일어났다. 태국 총선에서 신생 정당인 전진당이 창당 3년 만에 제1당을 차지한 것이다. 전진당은 그동안 금기시됐던 왕실모독죄 형량 완화, 징병제 폐지, 동성결혼 합법화 등 진보 정책을 내세우면서 이슈를 주도했다. 결국 2030 유권자들의 열성적 지지를 기반으로 하원 500석 가운데 151석을 획득했다. 수도 방콕 선거구 33곳 가운데 32곳을 휩쓸었다. ‘방콕의 봄’이 만개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입헌군주제이며 사실상 군부가 통치 중인 태국에서 이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은 기성 권력을 상징하는 왕실과 군부도, 기득권 체제에 편입된 제1야당도 모두 싫다는 민심이 결집된 것으로 읽힌다. 단순한 변화를 넘어 정치 구조 자체의 교체를 원하는 민심이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낸 것이다. 전 세계 언론에선 ‘정치적 지진’이라고 평했다.



신생 전진당이 꽃피운 ‘방콕의 봄’

전진당의 앞길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험난하다. 야권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한다 해도 군부와 기득권의 반발을 이겨낼지는 미지수다. 태국은 1932년 이후 군부 쿠데타만 무려 19차례나 발생했다. 태국 경제의 체질 개선 등 과제도 산적해 있다. 하지만 왕실과 군부, 기존 정당의 기득권 구조를 깨뜨리고 민주화의 진전을 이뤄낸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러한 태국 총선 결과는 정쟁만 거듭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치에 시사점이 크다. 지역 기반과 진영을 근간으로 기득권에 안주하는 여야 정치권의 모습에 민심이 점차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0.73% 포인트의 초접전 대선 결과에 반성과 성찰을 통해 국민 통합과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 보다는 적대적 공생 관계에 기대어 편 가르기 정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장, 내년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았지만 여야의 ‘혁신 경쟁’은 실종된 상황이다. 여당은 ‘윤심(윤석열 대통령 의중)’ 살피기에 급급한 모습이고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잇달아 패배한 제1야당은 변변한 혁신 공천안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여야가 자체 동력으로 민심을 얻기보다 상대의 자책골을 내심 기대하고 있지 않느냐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국민의힘에선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주목하고 있고, 민주당은 은근히 윤석열 정부의 실정에 기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거대 양당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21대 국회에서 여야 초선 의원들은 내부 기득권에 저항하는 정치적 결기보다 주류의 입장을 대변하는 돌격대 역할을 하거나 눈치 보기에 연연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야의 극한 대치에 물밑 협상의 끈을 이어가야 할 중진·원로들의 역할도 실종된 지 오래다. 여야의 협치는 물론 당내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한국 정치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정치적 현실이 이렇다 보니 지난 대선에 이어 내년 총선도 네거티브 공세가 넘쳐나는 역대급 비호감 선거가 되지 않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각종 여론조사 결과,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무당층은 30%대를 넘나들며 지지율로는 여야를 넘어 1위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여야의 지지층이 대거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선 제3지대론을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야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내년 4월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자연스레 여야 지지층 결집 양상이 나타나면서 기존 양당 경쟁 구도가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제3지대론은 대선 주자급 구심점도 없는데다 그동안 실패한 전례들을 고려할 때, 현실성이 높지 않다는 계산이다. 현재의 정치 구도에서 민심이 갈 곳은 없다는 오만한 인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적대적 공생 체제 이젠 종식시켜야

하지만 민심은 그리 간단치 않다. 민심의 역동성은 한국 사회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다. 산전, 수전, 공중전 등 역대의 난관을 극복해 온 민심이다. 군부 독재에 맞서 온 국민이 거리로 나서 1987년 민주화를 쟁취했고 촛불로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민심이 나서지 않고 적대적 공생 관계에 안주하는 정치권이 스스로 변하기는 쉽지 않다. 민심이 정치권의 변화를 이끌어야 하고 더 나아가 창조적 파괴를 촉발시켜야 한다. 이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방법은 참여다. 적극적 참여만이 판을 바꿀 수 있다. 지역과 진영, 세대와 젠더 등을 뛰어넘는 시민적 연대가 요구된다. 정쟁의 시대, 시민들의 역동적이고 유쾌한 반란으로 종식시켜야 한다. 전진당 돌풍이 만들어 낸 태국의 봄은 결코 예측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는 그렇게 온다. 내년 4월 총선, 거대한 민심의 결집이 한국 정치의 새로운 봄을 견인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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