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생각’ ] 제 빛깔과 향기를 되찾은 늙은 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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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생각’ ] 제 빛깔과 향기를 되찾은 늙은 뽕나무
2019년 12월 26일(목) 04:50
마을 앞들의 나무가 재산과 권력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다. 비단을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여기던 농경문화 시절의 이야기다. 비단을 잣기 위해서는 누에를 쳐야 하고, 누에를 실하게 키우려면 먹이를 넉넉히 먹여야 했다. 누에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인 뽕나무 잎을 얻기 위해 키우는 뽕나무는 그 시절, 부(富)의 상징이었다. 너른 논보다 앞들의 무성한 뽕밭이 한 마을의 풍요를 보여 주는 자부심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도 뽕나무 키우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왕비는 궁궐에서 뽕나무를 키우면서 해마다 봄이 오면 뽕나무 앞에서 친잠례를 치렀다. 양잠(養蠶)을 격려하는 왕실 차원의 예식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왕비의 손길이 닿았던 뽕나무는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왕비가 친잠례를 치르던 뽕나무의 후계목으로 여겨지는 뽕나무 한 그루가 지금도 창덕궁에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우리 옛 농경문화의 중요한 자취로 기억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나무다.

뽕나무는 그의 열매인 오디가 소화를 잘 시키는 바람에, 오디를 많이 먹으면 방귀를 뽕뽕 뀌게 된다 해서 ‘뽕’나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얻게 됐다. 뽕나무는 또 남녀상열지사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제로 뽕나무가 무성히 자란 뽕밭이 청춘 남녀의 밀회 장소로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자. 뽕잎을 따기 위해 키우는 뽕나무가 잎을 딸 수 없을 만큼 높이 자라면 농가에서는 쓸모를 잃는다. 이 때문에 뽕나무는 높게 자라지 못하도록 어릴 때부터 나뭇가지를 잡아주며 키웠다. 생명력이 왕성한 뽕나무는 위로 뻗을 에너지를 사방으로 더 넓게 펼치며 자랄 수밖에 없다. 결국 뽕나무는 가지를 옆으로 무성하게 뻗으며 자란다. 여러 그루의 뽕나무를 키우는 뽕나무 밭은 무성한 가지 덕에 바깥에서는 뽕밭 안쪽의 사정을 살필 수 없게 된다. 밀회를 즐길 이렇다 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던 시절에 뽕밭은 당연히 남녀상열을 즐길 은밀한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서의 뽕나무는 높게 자라는 나무다. 강원도 정선군청 앞의 고택, ‘고학규 가옥’ 대문 곁에는 무려 25미터까지 솟아오른 한 쌍의 뽕나무가 있다. 뽕잎을 따기 위해 심은 나무라기보다 한 가문의 상징으로 소중히 보존한 나무이다 보니, 천성대로 높이 자란 뽕나무다. 따지고 보면 뽕나무는 자신의 본색보다 사람에 의해 지어진 이미지가 더 많은 나무였다.

이달 초에 경북 상주의 뽕나무 한 그루가 창덕궁의 뽕나무에 이어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됐다. 절차에 따라 한 달의 예고 기간에 별다른 문제가 없음이 확인되면, 살아 있는 생물에게 국가가 부여하는 최고의 지위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두 번째 뽕나무가 된다.

새로운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된 상주 두곡리 뽕나무는 높이가 10미터나 되고, 사방으로 펼친 나뭇가지의 폭이 무려 16미터에 이르는 매우 큰 나무다. 수령은 300년을 넘긴 것으로 짐작된다. 워낙 큰 나무여서 뽕잎을 따기 위해 심어 키웠던 나무라기보다는 마을의 상징으로 정성껏 보존한 나무로 보인다. 예전에 상주 지역이 양잠이 번성했던 지역이고, 이 지역의 모든 뽕나무를 대표할 만큼 아름답고 큰 나무라 해서 지역의 상징이 된 것 같다. 나무 앞에는 상주 지역의 군수를 지낸 최병철(崔秉轍)이라는 이가 나무의 가치를 오래 보존하겠다는 뜻으로 1935년에 세운, ‘명상(名桑)기념비’가 세월의 흔적을 안고 여태 남아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본성과 특징이 있다. 나무도 그렇다. 큰 키로 자라는 전나무나 소나무가 있는가 하면, 낮은 키로 무성하게 자라는 개나리나 진달래도 있다. 진한 향기를 품고 피어나는 꽃이 있으면, 향기 없이 담백하게 피어나는 꽃도 있다. 숱하게 많은 살아 있는 것들이 빚어내는 자기만의 빛깔과 향기는 제가끔 서로 다르다. 밝고 어두움이 있는가 하면 짙고 옅음이 있게 마련이다.

뽕나무 역시 자기만의 빛깔과 향기가 있다. 그러나 뽕나무는 오랫동안 제 빛깔과 향기를 억누르고 사람의 필요에 따라 자라면서 재산의 가치로, 혹은 남녀상열의 상징으로만 남았다. 늦게나마 제 빛깔과 향기를 간직한 한 그루의 뽕나무가 천연기념물에 지정되는 건 환영할 일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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