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12·3 내란과 광복 8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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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분하는 기준 중의 하나가 쿠데타, 그 중에서도 대통령이 일으키는 친위쿠데타다. 12·3 내란 이전의 마지막 친위쿠데타는 박정희의 1972년 10월 유신이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의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총통제가 되고 말 것”이라고 예언했다.
박정희는 “한 번 더 뽑아 달라는 정치 연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반박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연임 제한이 없는 총통이 됨으로써 김대중의 예언을 현실로 만들었다.
박정희는 “국회 해산 및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일부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키고, 정지된 헌법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당시의 국무회의)가 대신한다”는 이른바 ‘특별선언’을 선포했다. 국회해산권은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한 이른바 10월 유신은 명백한 내란죄였지만 군대와 경찰이 박정희의 사병(私兵)이었으므로 처벌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공포한 이른바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의 ‘자의적 판단’을 유일한 근거로 국정 전반에 걸쳐 긴급조치를 내릴 수 있게 했다. 긴급조치로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법원의 권한을 정지할 수 있게 했는데 이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12·3 내란을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우기는 윤석열과 그 지지세력들의 정신세계가 21세기 대한민국이 아니라 52년 전 유신 선포시대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준다.
윤석열은 박정희·전두환의 아바타이다. 유신과 1979년의 12·12 쿠데타 때는 군대와 경찰들이 박정희·전두환의 사병이었지만 12·3 내란 때는 최고위 장성들과 최고위 경찰들은 윤석열의 사병이었어도 하급 장교나 부사관, 일반 병사들은 아니었다는 점이 달랐다.
12·3 당일 윤석열은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총을 쏴서라도 (국회)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고 지시하고, 국회에서 계엄해제가 의결된 뒤에도 “내가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는거니까 계속 진행해”라고 직접 명령했지만 21세기에는 통할 수 없는 철 지난 레코드였다. 만약 윤석열과 김용현의 계획대로 되었으면 많은 목숨이 희생되고, 우리 사회 또한 엄청난 시련을 겪었겠지만 이런 체제가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윤석열의 미스터리는 출마 선언은 매헌 윤봉길 기념관에서 해 놓고 왜 취임 후에는 이완용의 길을 따랐는가 하는 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전번역원 등 역사와 인문학 관련 국가기관들의 수장을 “일제 때가 좋았다”는 뉴라이트 인사들로 채운데서 그 답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독립지사들의 뜻을 계승해야 할 독립기념관장에 광복회의 거듭된 반대를 무릎쓰고 친일인사를 임명했을 정도로 뉴라이트는 곧 윤석열이었다.
12·3 내란사태는 우리 사회에 근본적 질문을 던져주었다. 현재 한국은 전 세계의 K-컬쳐 붐을 주도하는 문화선진국이다. 그러나 이번 내란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 수뇌부는 일제 시대와 군부독재 시대의 향수에 젖어살면서 부정선거가 가능하다고 믿는 지진아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간 사회 외곽에서 소외되어 있던 비주류가 아니라 황교안이나 한덕수가 보여주듯이 평생 고위 검사와 고위 관료로서 우리 사회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주류들이라는 사실이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결국 문제는 역사관으로 귀결된다. 전광훈 목사 집회에 참석해 탄핵을 막지 못해 죄송하다고 큰 절을 한 윤상현의 작은 조부 윤종화가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죽이고 고문하던 종로경찰서의 유일한 조선인 출신 서장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2·3 내란사태는 사회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는 친일, 극우라는 암적 존재를 완전히 들어내야 한다는 과제를 던져주었다. 1945년 8월 15일, 제거되었어야 할 친일매국세력이 미군정, 이승만 정권과 손잡고 거꾸로 독립지사를 숙청한 그릇된 과거를 바로잡아야 할 과제를 던져주었다.
새해에 맞는 80주년 광복절이 진정한 광복 원년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새해의 문을 연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박정희는 “국회 해산 및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일부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키고, 정지된 헌법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당시의 국무회의)가 대신한다”는 이른바 ‘특별선언’을 선포했다. 국회해산권은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한 이른바 10월 유신은 명백한 내란죄였지만 군대와 경찰이 박정희의 사병(私兵)이었으므로 처벌하지 못했다.
윤석열은 박정희·전두환의 아바타이다. 유신과 1979년의 12·12 쿠데타 때는 군대와 경찰들이 박정희·전두환의 사병이었지만 12·3 내란 때는 최고위 장성들과 최고위 경찰들은 윤석열의 사병이었어도 하급 장교나 부사관, 일반 병사들은 아니었다는 점이 달랐다.
12·3 당일 윤석열은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총을 쏴서라도 (국회)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고 지시하고, 국회에서 계엄해제가 의결된 뒤에도 “내가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는거니까 계속 진행해”라고 직접 명령했지만 21세기에는 통할 수 없는 철 지난 레코드였다. 만약 윤석열과 김용현의 계획대로 되었으면 많은 목숨이 희생되고, 우리 사회 또한 엄청난 시련을 겪었겠지만 이런 체제가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윤석열의 미스터리는 출마 선언은 매헌 윤봉길 기념관에서 해 놓고 왜 취임 후에는 이완용의 길을 따랐는가 하는 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전번역원 등 역사와 인문학 관련 국가기관들의 수장을 “일제 때가 좋았다”는 뉴라이트 인사들로 채운데서 그 답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독립지사들의 뜻을 계승해야 할 독립기념관장에 광복회의 거듭된 반대를 무릎쓰고 친일인사를 임명했을 정도로 뉴라이트는 곧 윤석열이었다.
12·3 내란사태는 우리 사회에 근본적 질문을 던져주었다. 현재 한국은 전 세계의 K-컬쳐 붐을 주도하는 문화선진국이다. 그러나 이번 내란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 수뇌부는 일제 시대와 군부독재 시대의 향수에 젖어살면서 부정선거가 가능하다고 믿는 지진아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간 사회 외곽에서 소외되어 있던 비주류가 아니라 황교안이나 한덕수가 보여주듯이 평생 고위 검사와 고위 관료로서 우리 사회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주류들이라는 사실이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결국 문제는 역사관으로 귀결된다. 전광훈 목사 집회에 참석해 탄핵을 막지 못해 죄송하다고 큰 절을 한 윤상현의 작은 조부 윤종화가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죽이고 고문하던 종로경찰서의 유일한 조선인 출신 서장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2·3 내란사태는 사회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는 친일, 극우라는 암적 존재를 완전히 들어내야 한다는 과제를 던져주었다. 1945년 8월 15일, 제거되었어야 할 친일매국세력이 미군정, 이승만 정권과 손잡고 거꾸로 독립지사를 숙청한 그릇된 과거를 바로잡아야 할 과제를 던져주었다.
새해에 맞는 80주년 광복절이 진정한 광복 원년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새해의 문을 연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