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 시인 43년만에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재발간 ‘화제’
“무도한 세력은 물론 시민들에게 이 시대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 책을 펴내”
![]() 1980년 6월 2일자 광주일보(옛 전남매일). 김준태 시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왼쪽)가 계엄사 검열단에 의해 제목과 기사가 무참하게 잘려나간 채 발행됐다(오른쪽). <광주일보 자료사진> |
“80년 5월 광주 끝에서 세상 살아가는 길을 찾았다. 아니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았다. 그것은 희망이자 사랑일 것이다.”
김준태 시인이 지난 81년 펴낸 시집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를 생명과 문학 출판사에서 재발간했다.
18일 금남로에서 만난 시인은 여전히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거리에서 또는 취재 현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는 특유의 큰 목소리로 반갑게 후배들을 맞아주곤 했다. 소식이 뜸하다 싶으면 언제인가 싶게 책 발간 소식을 전해올 만큼 부지런하고 성실한 ‘광주의 명물 시인’이다.
특히 시인은 80년 6월 2일 광주일보(옛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창작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5·18 광주의 아픔을 세계에 알린 뜨거운 명작으로, 당시 계엄군의 검열로 109행 중 33행만 지면에 실렸다.
그는 이번 시집 발간 계기에 대해 “80년 당시 광주에서 보았던 ‘하느님’을 서울 등 전국에서도 봤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며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무도한 세력은 물론 많은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이 시대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 책을 펴냈다”고 전했다.
그는 젊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걷고, 시를 쓴다. “어느 날은 하루에도 20편 이상의 시가 쏟아져 나올 때도 있을” 만큼 그는 천상 시인의 운명을 타고 났다.
매일 전일빌딩245 3층 디지털 도서관에 출근하는 것도 하루의 루틴이다. 그곳에서 시도 쓰고, 번역도 하고, 문예지에 게재할 글도 쓰면서 하루하루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하느님을 보았다’의 의미는 “이 시대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한 뜻이 투영돼 있다”며 “우리를 있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며 죽은 우리도 있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다소 철학적 사유의 말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시집에는 광주 시민들의 영혼도 투영돼 있다”며 “시와 인간, 세계와 생명을 유기적 관계로 풀어낸 문학사적 의미도 담았다”고 부연했다.
이번 시집은 지난 80년 5월부터 이듬해인 81년 5월 1년에 걸쳐 창작한 시들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의 감성과 의기, 에너지는 여전하다.
“1980년 7월 31일/ 저물어 가는 오후 5시/ 동녘 하늘 뭉게구름 위에/ 그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이/ 앉아 계시는 하느님을/ 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 몸이 아파 술을 먹지 못하고/ 대신 콜라로나 목을 축이면서/ 나는 정말 하느님을 보았다/ 나는 정말 하느님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는 다분히 상징적인 언술로 다가온다. 80년 5월 핏빛으로 물들던 광주를 체험했던 그가 본 하느님은 “인간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만큼 당시 시인으로서 그가 꿈꾸고 추구했던 하느님은 “영적 체험과 역사적 체험을 분리하지 않고 민중과 함께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대상”일 것이다.
한편 문학평론가 고(故) 김치수 전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는 그의 작품에 대해 “대단히 거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시적 표현들은 언제나 두 개의 강렬한 이미지들이 부딪힘으로 인해서 끊임없는 불꽃을 튀게 만들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잠든 의식에 충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라며 “그 충격은 우리 시가(詩歌)의 전통적인 가락 때문에 유장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경험하게 한다”고 평한 바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사랑’을 힘주어 말했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힘들고 고통 속에 놓여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모든 것이 지구가 멸망해도, 멸망 끝에서 타오르는 것은 사랑이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은 것은 사랑이다.”
한편 해남 출신의 시인은 지금까지 ‘참깨를 털면서’, ‘칼과 흙’ 등 시집 17권과 영역시집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일본어시집 ‘광주로 가는 길’, 독일어시집 ‘물거미의 노래’ 등을 펴냈다. 광주대, 조선대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5·18기념재단이사장을 역임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김준태 시인이 지난 81년 펴낸 시집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를 생명과 문학 출판사에서 재발간했다.
18일 금남로에서 만난 시인은 여전히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거리에서 또는 취재 현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는 특유의 큰 목소리로 반갑게 후배들을 맞아주곤 했다. 소식이 뜸하다 싶으면 언제인가 싶게 책 발간 소식을 전해올 만큼 부지런하고 성실한 ‘광주의 명물 시인’이다.
그는 이번 시집 발간 계기에 대해 “80년 당시 광주에서 보았던 ‘하느님’을 서울 등 전국에서도 봤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집을 출간했다”며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무도한 세력은 물론 많은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이 시대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 책을 펴냈다”고 전했다.
매일 전일빌딩245 3층 디지털 도서관에 출근하는 것도 하루의 루틴이다. 그곳에서 시도 쓰고, 번역도 하고, 문예지에 게재할 글도 쓰면서 하루하루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하느님을 보았다’의 의미는 “이 시대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한 뜻이 투영돼 있다”며 “우리를 있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며 죽은 우리도 있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다소 철학적 사유의 말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시집에는 광주 시민들의 영혼도 투영돼 있다”며 “시와 인간, 세계와 생명을 유기적 관계로 풀어낸 문학사적 의미도 담았다”고 부연했다.
![]() 김준태 시인이 올해 재발간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왼쪽)와 81년 펴낸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
“1980년 7월 31일/ 저물어 가는 오후 5시/ 동녘 하늘 뭉게구름 위에/ 그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이/ 앉아 계시는 하느님을/ 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 몸이 아파 술을 먹지 못하고/ 대신 콜라로나 목을 축이면서/ 나는 정말 하느님을 보았다/ 나는 정말 하느님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는 다분히 상징적인 언술로 다가온다. 80년 5월 핏빛으로 물들던 광주를 체험했던 그가 본 하느님은 “인간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만큼 당시 시인으로서 그가 꿈꾸고 추구했던 하느님은 “영적 체험과 역사적 체험을 분리하지 않고 민중과 함께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대상”일 것이다.
한편 문학평론가 고(故) 김치수 전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는 그의 작품에 대해 “대단히 거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시적 표현들은 언제나 두 개의 강렬한 이미지들이 부딪힘으로 인해서 끊임없는 불꽃을 튀게 만들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잠든 의식에 충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라며 “그 충격은 우리 시가(詩歌)의 전통적인 가락 때문에 유장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경험하게 한다”고 평한 바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사랑’을 힘주어 말했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힘들고 고통 속에 놓여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모든 것이 지구가 멸망해도, 멸망 끝에서 타오르는 것은 사랑이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은 것은 사랑이다.”
한편 해남 출신의 시인은 지금까지 ‘참깨를 털면서’, ‘칼과 흙’ 등 시집 17권과 영역시집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일본어시집 ‘광주로 가는 길’, 독일어시집 ‘물거미의 노래’ 등을 펴냈다. 광주대, 조선대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5·18기념재단이사장을 역임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