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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봄날 단상(斷想)
2024년 04월 04일(목) 00:00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봄이 기쁜 것은 꽃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봄꽃을 춘화(春花)라고 하지만 화려하다는 뜻에서 춘화(春華)라고도 한다. 그러나 봄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월사 이정귀는 “저도에 봄꽃은 피고 또 지는데/ 술집 아래 황공이 몇 번이나 생각나랴(楮島春花開又落/幾回 下憶黃公)”라는 시구를 지었다. 황공(黃公)은 황공주로의 줄임말로서 옛 친구들과 놀던 선술집을 뜻한다. 삼국을 통일한 진(晉)은 크게 번성했지만 정치가 문란해지면서 세상과 연을 끊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나타났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이 상서령(尙書令)이 되어서 황공주로 앞을 지나면서 수레 뒤에 탄 사람에게, “내가 옛날 혜강·완적(阮籍) 등과 함께 이 주점에서 술을 마시면서 죽림(竹林)에서 놀았었다. 혜강과 완적이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세속에 몸이 묶여 지내고 있다. 오늘 이곳을 보니 거리는 비록 가까우나 산하가 가로놓인 듯 아득하게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왕융은 죽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돈에 집착해서 상아로 만든 주판인 아주(牙籌)를 쥐고 밤낮 돈을 세었다. 그래서 혜강과 완적 등은 죽림에서 술을 마시다가 왕융이 오면 “속물이 또 와서 사람의 흥을 깬다.”고 핀잔을 주었다는 고사가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온다.

죽림칠현 중에 가장 고고했던 인물이 혜강이었다. 그는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나라 출신이었고, 조조의 증손녀 장락공주와 혼인해서 중산대부(中散大夫)가 되어서 ‘혜중산’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사마씨(司馬氏)가 위의 국정을 장악하자 벼슬을 거부하고 은거해서 지조를 지켰다. 권력자인 대사마(大司馬) 종회(鍾會)가 찾아왔으나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종회의 모함에 빠져서 사후 진(晉)의 태조로 추숭되는 당시의 대장군 사마소(司馬昭)에 의해 처형당했다. 혜강은 단두대에서 마지막으로 광릉산(廣陵散)을 연주했는데 연주가 끝난 후 “원효(袁孝) 스님이 일찍이 광릉산을 배우려고 했는데 내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광릉산은 지금부터 끊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죽음 앞에서 안타까워한 것이 광릉산이 전해지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영혼을 현실의 권력은 용납하지 않았다. 몸은 죽었지만 혜강은 정신이 자유로웠던 진정 죽림지사였다.

조선의 송강 정철은 선조 13년(1580)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 받고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운운하는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다. 그러나 죽림에 눕고 싶다던 말과는 달리 선조 22년(1589) 정여립 사건을 다스리면서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실제 마음은 죽림과는 멀었다. 마음만은 죽림이고자 했던 대표적 인물이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다. 한명회는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 1년(1453)의 계유정변 때 김종서 등을 죽이고 세조 2년(1456) 상왕 단종 복위기도사건(사육신 사건) 때 200여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다. 그가 한강가 풍광 좋은 곳에 ‘백구가 희롱한다’는 뜻의 압구정(狎鷗亭)을 짓자 많은 사람들이 시를 지어 칭송했다. 그런데 판사 최경지(崔敬止)는 “가슴 속 서린 기심(機心:책략을 꾸미는 마음) 고요해지면/ 벼슬 바다 위에서도 갈매기와 친해질 수 있으리(胸中自有機心靜/宦海前頭可押鷗)”라고 풍자했고, 한명회가 그의 시는 현판으로 달지 않았다고 ‘추강냉화’는 전한다. 벼슬하지 않은 포의 이윤종은 압구정 아래를 지나다가 “정자가 있으나 돌아가지 않으니/ 참으로 이 인간은 갓 씌운 원숭이로구나”라고 조롱했다.

이런저런 인간사에도 불구하고 봄날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고려인 이규보는 “그대는 봄 동산의 풍성한 살구와 복숭아를 보지 못했는가/ 모두 하늘이 만든 재주 아닌가/ 이처럼 꽃다운 시절에 미친 듯이 읊어나 보세(君不見春園富貴紅杏與緋桃/無奈天工費剪刀/芳辰若此宜狂吟)”라고 노래했다. 봄날이 얼마나 가랴. 이규보처럼 즐겨보자.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