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영정, 첫째가는 아름다운 풍광서 만나는 옛 선비의 詩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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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 첫째가는 아름다운 풍광서 만나는 옛 선비의 詩文
광주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호남 누정-광주 <3>
“시가(詩歌)를 읊조린다”는 의미 ‘풍영’
관직서 물러난 김언거 선생 낙향해 지은 정자
신창동 선창산과 극락강이 접하는 곳에 자리
당시 12동이었지만 병화에 불타 한 채만 남아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4호 지정
2023년 04월 30일(일) 18:20
광주 신창동에 있는 풍영정은 광산 출신 김언거 선생이 중앙의 벼슬을 마치고 낙향해 지은 정자다.
그 정자에 가면 시가 한 소절 나올 것 같다. 이름마저 시적이다. 풍영정(風詠亭). 야트막한 산자락에 들어앉은 누정은 담박면서도 수수하다.

영산강을 따라 풍영정을 향해 간다. 며칠 전 내린 비로 강의 몸피가 다소 불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비였다. 옷깃을 살포시 적시는 정도의 비라도 고맙다. 해갈이 안 될망정 땅의 목축임만으로도 고맙다.

영산강은 봄에서 여름 사이, 몸살을 앓는다. 단비를 기다리다보니 스스로 몸을 뒤챈다. 강물 너머 적요와 한가로움이 깃든다. 어느 결에 새 한 마리 강 너머에서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익숙한 풍경이다. 사선을 그으며 비상하는 모습, 온전한 자유의 몸짓이다.

사람들은 저 강을 영산강이라 부르지만, 더러 극락강(極樂江)이라 부른다. 극락강은 영산강의 한 구간이다. 영산강과 황룡강이 분기되는 지점부터 광주천이 갈리는 곳이다. 광산구 신가동과 신창동, 운남동 일대가 극랑강변과 이웃해 있다. 강과 지형에 능통한 이들은 영산강과 극락강을 세세하게 구분해 말하지만 일반에게 이곳은 영산강이기도 하고 극락강이기도 하다.

풍영(風詠)은 “시가(詩歌)를 읊조린다”는 의미다. 시와 노래를 즐기는 공간이다. ‘논어’에서 유래한 말로 공자가 제자들에 소원을 묻자 증점이 대답한 데서 나왔다. “기수에서 목욕을 하고 나서 무(無雩)에서 바람을 쐬면서 시를 읊으며 돌아오고 싶습니다/풍우영귀(風雩詠歸)”라고 답한 것이 유래됐다 한다.

그 말은 점차 ‘자연과 벗하며 시를 읊다’라는 말로 전이된다. 정말이지 절로 한 소절의 시가 발원할 것 같다. 풍경을 지긋이 바라보며 마음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도 좋을 듯하다. 시를 소리 내 읊다보면 한 마리 새처럼 자유를 느낄지 모를 일이다.

풍영정은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된 정자다. 광산 출신 칠계(漆溪) 김언거 선생(1503~1584)이 홍문관교리, 중앙의 승무원 판교 등의 벼슬을 마치고 낙향해 지었다. 선생은 지금의 신창동 선창산과 영산강 상류인 극락강이 접하는 자리를 택했다. 당시에는 12동이나 될 만큼 규모가 컸지만 병화에 불타고 지금은 한 채만 남았다.

선생의 풍광을 보는 안목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앞으로 영산강 뒤로는 선창산이 있어 전형적인 임산배수의 지형이다. 신가지구가 개발된 후로는 예전의 산천은 아니지만 풍경의 잔영은 남아 있다.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의 물살을 바라보면 마음 저편에 드리워진 심원의 물소리 또한 들리는 것 같다.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 원장은 “옛적 이곳은 광산에서 장성으로 가는 길목으로 한양 가는 선비들이 잠시 다리쉼을 하며 시가를 짓던 곳이었다”며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 영산강의 운치를 느끼다 보면 누구라도 시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첫째가는 풍경이라는 뜻의 ‘제일호산’ 현판. <한국학호남진흥원 제공>
눈길을 끄는 것 가운데 하나가 편액이다.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 그것. 다소 과람한 상찬이 아닌가 하여도 칠계 선생이 이곳에서 바라본 풍광은 ‘제일호산’에 값하고도 남는다. 단순한 임산배수라는 풍수로는 포괄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제일가는 물과 산이라는 뜻이다. 영산강과 멀리 보이는 무등산까지 그 의미에 수렴된다. 현판 글씨는 조선의 명필 한호(韓濩) 한석봉이 쓴 것이라 전해온다.

풍영정 내부 모습.
제일호산을 가늠하며 저 멀리 눈을 둔다. 강이 살포시 흐르고 너머엔 푸른 벌이 펼쳐져 있다. 수년 전 영산강 개발로 들녘의 정취가 예전만 못하지만 영산강은 영산강이다. 이곳을 스치는 이들이라면 마음 한켠에 풍경에 대한 심상이 담담히 차오르겠다. 시문이 발아될 지도 모른다.

현판 가운데 ‘선창에 배 띄우고’(仙滄泛舟)라는 시가 눈에 들어온다. 옛 시절에는 정말 잔망한 강에 배가 떠 있었을 것 같다.

풍영정 유래에 대한 전설이 적힌 비문.
하얀 마름 붉은 여뀌 해 저문 가을 강가에

작은 배 한 척이라니 생계는 허랑하여라

그저 그렇게 쉽게 건너는 줄 알았건만

가운데 다다르기도 전에 부침에 몸을 맡기네

돛을 달아 먼 하늘가 내리는 비를 피하며

모래사장 갈매기 놀랄까 느릿느릿 노젓네

살아온 생애 아직 충분하지 않은 건

그대와 함께 세상 밖 선경을 찾아가는 듯



정자 내부에는 대유(大儒)들의 글귀가 걸려 있다. 하서 김인후 외에도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등 조선 선비들의 글귀가 걸려 있다. 각각의 제영현판(題詠懸板)은 풍영정의 역사적, 학술적 위상을 여실히 증명한다. 다른 무엇보다 김언거의 학문에 대한 열망, 시문에 대한 감성이 넌지시 헤아려진다.

가만히 보니 풍영정 현판의 글씨가 글자별로 조금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정자들은 대부분 불에 탔지만 이곳 풍영정만 소실을 면한 것은 저간의 사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내화전설(耐火傳說)이 그것.

다른 누정이 타고 불길이 풍영정으로 옮겨 붙자 신기한 일이 펼쳐졌다. 현판 글자의 ‘풍’자가 오리로 변해 강으로 날아오른다. 신묘막측한 상황을 본 왜적 장수가 불을 끄도록 하자, 이번에는 극락강의 오리가 현판으로 날아들어 글씨로 변한다. 혹자들은 ‘풍’자와 ‘영정’의 글씨체가 차이가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전설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풍영정에서 바라본 영산강 풍경.
풍영정에서 강 저편을 바라본다. 초야에 묻힌 선비의 담담한 심사가 전해온다. 극랑강 붉은 철교 위로 기차가 달린다. 허공으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기차와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는 어디로 내달리는 것일까. 극락강이라는 이미지에 오버랩되며 신비한 아우라를 발한다. 정자에서 극락은 풍경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이려니 싶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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