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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 생각’] 겨울, 나무의 가시가 눈에 들어오는 계절
2020년 11월 26일(목) 07:00
나무들이 모두 잎을 내려놓았다. 속살이 드러난 나무들이 생체 활동을 최소화하고 겨울잠에 들 채비를 마쳤다. 소리도 움직임도 눈에 드러나지 않을 만큼 고요하게 살아가는 나무들 사이로 적막이 감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뭇가지와 줄기의 속살에서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바라보게 되는 계절이다.

나무의 속살에는 나무가 이 땅에서 살아오기 위해 애썼던 안간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잎으로 무성하게 덮여 있을 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나무 줄기와 가지에 무성하게 돋아 있는 가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줄기와 가시 등 식물의 몸체에 사나운 가시를 돋우며 살아가는 나무가 적지 않다. 가시는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몸체의 일부를 변화시킨 결과다. 가시를 돋운 거개의 나무는 무엇보다 먹을거리로 유용한 나무이기 십상이다. 초식동물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는 맛있는 잎과 여린 가지를 가진 나무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억센 가시로 짐승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나무들이 스스로 터득해 낸 지혜다.

두릅나무과의 음나무도 그렇다. 이른 봄에 음나무 가지에서 돋아나는 새순은 ‘개두릅’이라고 불리고, 그래서 아예 음나무를 ‘개두릅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삶아서 초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튀김옷을 입혀 튀겨 먹기도 하며, 연한 잎을 잘 말려 차로 우려내 먹기도 한다. 또한 ‘닭 백숙’을 고아 낼 때 쓰이는 음나무의 줄기 껍질도 먹을거리로 이용된다. 음나무의 연한 가지를 넣어 고아 낸 닭백숙은 맛이 고소하고 담백하며, 관절염과 요통에 일정한 효능을 가진다. 흔히 ‘엄나무 백숙’이라고 부르지만 나무의 이름은 음나무다.

하릴없이 음나무는 채 자라기도 전에 잎은 물론이고, 줄기와 가지가 꺾이는 수난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 음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가시를 사납게 돋워 사람을 비롯한 초식동물의 접근을 막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음나무를 집의 울타리 가까이에 심어 키우거나 여의치 않으면 음나무 가지를 얻어 와 대문이나 대청 앞에 걸어놓았다. 집안에 음나무가 있으면, 치마나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던 귀신들이 가시에 걸리게 되고, 당황한 귀신들은 “이 집안에는 귀신까지도 붙잡을 수 있는 대단한 무엇인가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자기 보호를 위한 나무의 생존 전략이 사람살이에도 적용된 예다.

원래 음나무는 주로 숲에서 자라는데, 사람살이의 한가운데인 마을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에 의해 사람의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나무를 울타리에 심어 놓는 것뿐 아니라, 나무의 가지로 6각형의 노리개를 만들어 어린아이의 허리춤에 채워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병마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민간에 널리 퍼진 믿음이었다. 이 노리개를 ‘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음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흥미로운 것은 크게 자란 음나무에서는 가시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분명 음나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식물 몸체 전체에서 돋아나는 억센 가시라고 했지만, 일정한 크기로 자라난 음나무에서는 가시를 볼 수 없다. 몸피를 어느 정도 키워서 초식동물의 위협을 벗어나게 되면, 가시를 스스로 떨어낸다. 뿌리를 깊이 내리고, 줄기도 굵어지고, 키도 커지고 나면, 가시가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잎과 가지를 가시로 변화시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가시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애면글면 살아남은 음나무는 모든 가시를 버리고 의연한 자태로 사람의 마을에서 사람을 지켜 주는 나무로 도도하게 살아간다.

느리게 살아가는 나무의 생명살이이지만 꼼꼼히 살피면, 그 안에 담긴 삶의 안간힘과 치열한 생존 전략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얼핏 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생명의 신비다. 무성했던 잎을 내려놓고, 속살을 드러낸 나무의 몸체에 담긴 생명의 알갱이를 살필 수 있는 계절, 바야흐로 겨울이다.

<나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