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광주 충장로 소년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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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광주 충장로 소년의 서
“책은 목소리…제도 밖 이야기 들려주고 싶어”
2020년 10월 14일(수) 07:00
임인자씨가 운영하는 책방 ‘소년의서’는 광주시 동구 충장로5가에 위치해있다. 사진은 서점의 낮과 밤의 모습.
오랜만에 서점 ‘소년의서’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인자씨는 서점에서 성명서를 쓰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이의 낡은 노트북을 떠올렸다. 소년의서가 개점했던 2016년 첫 방문 때도 그랬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에도 문 닫을 기미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서점 주인은 군데군데 흠집이 난 회색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도 성명서를 쓰는 중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때 어떤 내용의 성명서를 썼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지난 정부의 문화예술계 검열과 블랙리스트에 관한 것일 테다. (이 서점 주인은 연출가로서 공연계에서도 활약 중이다.) 이번에는 광주시립극단의 부조리한 시스템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서라고 한다. 공연 중 발생한 “배우들의 잦은 부상 및 안전사고, 산재보험 미가입, 계약의 지연, 불공정 계약 종용, 갑질, 폭언 및 인격 모독, 성희롱 발언 등”에 대한 조사를 요구한다는 내용이다. 성명(聲明)은 문자 그대로 ‘목소리를 밝히는’ 일이다. 또 다른 큰 이야기에 가려버릴 수도 있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변방, 또는 거기에서도 더 밖에서 일어난 일들의 미약한 ‘목소리’를 나는 임인자씨 덕분에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아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소년의서는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됐다. 1987년 폐쇄될 때까지 12년간 끔찍한 폭력과 인권유린이 자행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당시 소년이었던 피해자 한종선씨의 증언이 담긴 책 ‘살아남은 아이’다. 임인자씨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책을 그저 문학적인 어떤 것으로만 여겼다고 한다. ‘살아남은 아이’ 이후 그에게 책은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이 목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오랜 세월 거대서사에 가려지고 눌린, 제도 밖에서 떠돌던 목소리를.

소년의서는 그렇게 탄생한 서점이다. 소년의서 서가는 무수한 책으로 빽빽하다. 대략 3000종 정도 될 법하다. ‘인문사회과학예술서점’을 표방하고 있듯 페미니즘·노동·사회학·환경 관련 책들과 철학·미학·미술·연극 관련 책들이 균형을 이루며 서점을 채우고 있다. 특히 동시대의 문제를 다룬 책들의 비중이 높다. ‘공통점’과 같은 지역에서 생산된 독립출판물들도 서점의 한 자리를 채우고 있다.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소년의서를 방문하여 알게 됐다.) 서점 한 편에는 헌책도 제법 있는데, 이 헌책들이 늘어난 이야기가 특별하다. 이 서점에 꼭 있어야 한다며 소년의서를 찾아와 하나둘 기증하고 간 책들이란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예술서점’을 표방하는 소년의서에는 페미니즘·노동·사회학·환경철학·미학·미술·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비치돼있다.
서점의 중앙에는 커다란 커뮤니티 테이블이 놓여 있다. 이 자리에서 주인은 더 멀리 울려 퍼져야 할 작은 목소리들을 만나고, 코로나 시대의 공연을 함께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낡은 노트북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들의 목소리를 찾아내 선명한 활자로 살려놓는다.

최근 서점 주인이 펴냈다는 책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사실 이번에 만나서 나눈 이야기의 절반 이상이 이 책에 대한 것이었다. 광주시 동구의 지원으로 충장상인회와 함께 펴낸 ‘충장로 오래된 가게’라는 책이다. 임인자씨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충장로의 오래된 가게들을 찾아가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상인들이 고이 간직했던 옛날 사진은 물론 숨어 있던 다양한 기록물을 찾아내 이 거리의 과거와 현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목소리를 찾고, 밝히고, 기록하기. 이것이 이 서점이 이 오래된 거리에서 하는 일이다.

소년의서 뒷문은 광주극장 영화의집 안뜰과 연결되어 있다.
서점의 새 주소는 광주시 동구 충장로5가 62-25번지이다. 이곳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광주극장 바로 옆이다. 서점의 뒷문은 극장의 관사였던 ‘영화의집’ 안뜰로 연결된다. 영화의집 안뜰에는 광주극장 건물보다 더 키가 큰, 나이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알 수 없는 히말라야시다가 우뚝 서 있다. 이 나무는 광주극장과 영화의집이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지켜낸 것이다. 만일 두 건물이 사라졌다면 나무도 함께 사라졌을 테니까. 그리고 소년의서가 이 나무 곁에 둥지를 틀었다. 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오래 갔으면 좋겠다.

소년의서를 나와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데 어쩐지 뒤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광주극장 저 너머로 타워크레인이 보인다. 커다란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은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채의 작은 집과 골목이 사라지는 것일 테니 저곳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제는 다시 듣기 힘들지도 모른다. 임인자씨가 펴냈다는 책 속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충장로의 전성기를 목격하지 못했던 나에게 이 거리는 그저 생김새가 독특한 골목길 동네에 불과했다. 낡은 간판을 내건 상점들의 이야기를 몰랐을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높게 솟은 타워크레인이 사라지고 어디선가 수많은 행인들이 등장했다. 행인1, 행인2, 행인3, 행인4…. 무명의 산책자들이 충장로5가의 상점들을 방문한다. 서점 소년의서에는 약속 시간을 기다라며 책을 읽는 행인5, 행인6, 행인7이 있다. 행인11과 행인12는 광주에서 관객이 가장 많은 극장인 광주극장으로 뛰어들어간다. 상영 시간이 임박했나 보다.

/신 헌 창 책과생활 주인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소년의 서’가 추천합니다>

▲‘살아남은 아이: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

“9살 종선은, 1984년 12살이던 누나와 함께 복지원에 끌려간다. 그로부터 3년. 아이는 지옥을 경험한다. 1987년 복지원이 폐쇄된 후에도 ‘짐승의 기억’은 그의 삶을 유린한다. 그의 누나와 술 취해 잠자다 끌려온 그의 아버지는 평생을 정신병원을 떠돌아야만 했다. … 스스로를 괴물이라 칭하는 종선이 입을 연다. 지옥에서 살아남았으나 아직도 짐승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 37살 육체에 갇힌 9살 아이가 28년 만에 입을 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소년의서는 이 책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탄생했다. <한종선·전규찬·박래군 지음>

▲‘김군을 찾아서’

지난 해 개봉한 다큐멘터리영화 ‘김군’의 제작 초기부터 7년여에 걸쳐 이어진 103명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인 책. 오월 광주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어떻게 진실을 찾아 나서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이 책은 5·18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찾아나섬으로써 5·18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5·18은 엘리트의 역사가 아니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오월길을 안내하는 오월지기 역할도 수행하는 임인자씨가 오월묘역에 들를 때 가장 먼저 무명열사 묘역, 그다음 행불자 묘역을 찾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것은 5·18에 대한 진상규명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강상우 지음>

▲‘광주, 여성’

임인자씨가 고심 끝에 추천한 마지막 한 권은 이 책이었다. 늘 ‘밥’으로만 대변되어 5·18의 역사에서 제대로 명명되지 않은, 5·18 공간을 지켰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그렇지만 이 책은 가부장적 제도 안에서의 여성이 도드라지는 게 사실이에요.” 임인자 씨가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다음 편, 동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풀어내는 ‘광주, 여성’ 2편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그는 품고 있다.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기획, 이정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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