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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식 칼럼] 광주를 넘어 오월을 넘어
2019년 05월 15일(수) 00:00
국립 5·18 민주묘지로 가는 길머리가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오월이 되자 진입로 양쪽에 도열한 이팝나무들이 어김없이 흰 꽃부리를 밀어 올린 것이다. 가늘고 긴 꽃잎들은 햇가지 끝에서 고깔 모양의 꽃차례로 소담스럽게 뻗어 나간다. 멀리서 보면 때 아닌 눈꽃이 핀 듯도 하고, 흰 구름이 몽실몽실 내려앉은 것 같기도 하다.

너른 품으로 추모객들을 맞이하는 꽃잎의 자태는 민주화를 갈망했던 순백의 영혼들을 닮았다. 가지마다 조롱조롱 매달린 꽃송이는 영락없는 하얀 이밥(쌀밥) 덩이다. 영령들에겐 추모의 메를 지어 올리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그해 오월 함께 나눴던 주먹밥을 내밀며 대동(大同) 세상을 일깨우는 듯하다.

이곳에 이팝나무들이 심어진 것은 5·18 묘지 성역화 작업이 시작된 지난 1995년 봄부터다. 수백 그루의 이팝나무는 이후 매년 입하(立夏) 무렵부터 5·27 부활제 즈음까지 스무 날가량 활짝 꽃을 피워 오월을 환하게 밝힌다.

이팝나무 꽃그늘을 지나 5·18 묘지로 들어서면 ‘민주의 문’과 ‘참배 대기실’(지난 2일 준공)이 방문객을 맞는다. 참배 광장에는 전통 당간 지주를 형상화한 5·18 민중항쟁 추모탑(높이 40m)이 우뚝하다. 탑신 가운데 감싸 쥔 손 모양 안의 난형(卵形) 조형물은 새 생명과 오월 정신의 부활을 염원하는 듯싶다.

5·18 39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온 단체 추모객들이 광장에 줄을 잇고 있다. 옷깃을 바루고 제단에 분향한 뒤 ‘오월의 풀뿌리 꽃넋들이 누워’(문병란, 5·18 묘지 준공 기념 헌시) 있는 묘지로 들어선다. 묘지 번호 1-1엔 청각 장애인으로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숨진 첫 희생자 김경철 씨가 누워 있다. 부상자들을 위해 광주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귀가하던 중 M-16 총탄에 맞아 숨진 여고생 박금희(1-26). 시민군 대변인으로 전남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다 산화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2-11).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다 1982년 체포된 후 ‘5·18 진상 규명, 재소자 처우 개선’을 외치며 50일 간의 옥중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한 박관현(2-88) 열사…. 이들을 비롯해 현재 제1·2 묘역에는 당시 희생자와 유공자 828명이 잠들어 있다.

‘폭도’로 매도됐던 희생자들이 ‘유공자’로 이곳에 안장되기까지는 17년이 걸렸다. 5·18 직후에는 사람대접조차 못 받고 거적이나 비닐에 덮인 채 손수레 또는 청소차에 실려와 구 묘역에 가매장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 담화로 5·18 묘역 조성이 발표되고 1997년까지 성역화 사업이 완료된 후에야 오월 영령들은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은 2002년 7월이었다.

5·18 유공자들의 가묘가 남아 있는 구 묘역으로 가려면 ‘역사의 문’과 ‘숭모루’를 거쳐야 한다. 그 길목엔 광주일보를 비롯한 지역 언론사들이 오월 정신 계승을 위해 지난 1996년부터 이듬해까지 추진했던 헌수 운동 기념비가 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전남매일신문(광주일보의 전신) 기자들의 80년 5월 20일 자 호외 글귀를 새긴 시비도 보인다.

구 묘지의 현재 공식 명칭은 망월묘지공원 제3 묘역이다. 광주시 사적지 24호로 지정된 이곳은 한동안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참배조차 어려웠고 위령제는 원천 봉쇄됐었다. 묘지 자체를 없애려고 이장을 회유하는 등 방해 공작도 끊이지 않았다.

5·18 구 묘지가 의미를 더하는 것은 이곳에 5·18 이후 암울했던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화와 통일·노동 운동을 하다 산화한 전국의 민족민주열사 47명이 함께 안장돼 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의 한복판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다 경찰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부터 1988년 ‘광주 학살 진상 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에서 할복 후 투신한 서울대생 조성만, 그리고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가 끝내 숨을 거둔 백남기 농민 등….

5·18 무력 진압의 진상을 맨 처음 전 세계에 알린 영화 ‘택시 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의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품이 안장된 기념 정원도 구 묘역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묘역의 모습은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국립 5·18 민주묘지와 달리 거칠고 쓸쓸하기만 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가 담긴 곳이지만 정부가 세운 기념비 하나 없다. 유족과 추모객을 위한 쉼터와 화장실 등 편의시설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 부끄러운 일이다. 광주시는 지난 2014년 전시실과 추모관을 갖춘 300평 규모의 ‘민족 민주 열사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사업이 축소된 끝에 주차장 한편에 50평 규모의 유영(遺影) 봉안소만 들어섰다.

묘지마다 소박하나마 열사들의 행적을 소개하는 안내판을 설치한 것은 시민단체인 광주 전남 추모연대였다. 해마다 열사들의 기일에 추모제를 여는 것이나 안내·벌초·청소도 온전히 그들에게 맡겨져 있다. 하지만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면 참석자들이 밥을 먹을 공간조차 마땅치 않다. 오죽 서운했으면 일부 유족들 사이에서 ‘차라리 다른 곳에 땅을 사서 나가자’는 하소연까지 나올까. 이런 상황에서도 전국의 민족 민주 열사 유가족들은 희생자가 5·18 구 묘지에 묻히는 것을 선호한다. ‘민주화의 성지’라는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오월 광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봉화이자 깃발이었다. 80년대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 분신 정국, 촛불 혁명으로 이어지는 밑불이 되었다. 그것은 광주만의 힘으로 이룬 것은 아니다. 5·18 무력 진압 직후 독재 정권은 자신들의 추악한 범죄를 감추기 위해 갖은 탄압을 일삼았지만 전국에서 수많은 의인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몸을 던졌다.

80년 5월 30일 광주 학살에 항의하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투신한 서강대생 김의기 열사가 그 대열의 맨 앞에 섰다. 그를 포함해 80년대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스러져 간 민족 민주 열사는 16명, 민주화 및 학생·노동 운동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모두 127명에 이른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태 전 5·18 기념식에서 이들을 ‘전국의 5·18들’이라고 명명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이 다음달 6일까지 열고 있는 ‘전국의 5·18들-스스로 오월의 영령이 된 열사들’ 기획전에 가면 그들의 생생한 외침을 만날 수 있다.

광주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전국의 5·18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광주의 의무다. 희생과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광주가 먼저 그들을 보듬어야 한다. 그것은 광주를 넘어 오월을 넘어, 광주가 꿈꿔 온 5·18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논설실장.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