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의 ‘여백서원에서’] 편편의 노래에서 비쳐나오는 청순한 그레트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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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끌고 천지간을 3000년의 시공을 어지럽게 누비며 활개 치고 다니는 작품 ‘파우스트’ 한켠에서 조용하게 두드러지는 캐릭터가 악마와의 계약으로 젊어진 파우스트가 처음 만나게 되는 그레트헨이다. 지금도 여전히 청순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캐릭터이다.(그레트헨은 마가레테라는 이름을 줄인 애칭이다. 작품에서 홀로 있거나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레트헨으로 사회적으로 등장할 때는 마가레테로 불린다.)
현학적인 파우스트와는 대조적으로 그레트헨은 소박한 민중의 소녀이다. 길쌈이든 물 긷는 일이든 온갖 집안일을 성실히 하고 그러나 참으로 소녀다운 꿈이 있고 믿음이 있고 거의 본능적으로 선악에 대한 감각이 있다.(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레트헨의 단순한 질문에 악마와 결탁한 파우스트가 쩔쩔매는 짧은 한 장면 때문에 ‘그레트헨 질문’이라는 숙어가 생겨나기도 한다. 단순해 보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말한다.) 그러나 다름 아닌 그 좋다는 사랑을 알게 되면서 들뜨기도 하고 그러다 죄에도 휘말리고 마침내는 광인이 돼 감옥에서 죽는다. 처형당한 그녀에게 높은 곳으로부터 ‘구원받았노라’라는 음성이 들려온다. 스스로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어딘가 높은 곳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거의 ‘구원의 여성상’으로 상승해 있다.
소박한 소녀 하나를 어떻게 묘사했길래 이 많은 것이 다 담겼을까. 소녀답고 소탈하고 올곧은 성품도 짧은 대사들에서 간간이 묻어나긴 하지만 무엇보다 자주 때로는 단 한 편이 연극의 한 장면 전체를 이루는 정교한 노래들을 통해서이다. 교회를 나와 길거리에서 파우스트를 만나게 되는 짧은 장면에 이어 그레트헨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부르는 노래 ‘툴레의 임금님’은 그레트헨의 청순함을 결정적으로 각인시키는 노래이다. 죽을 때까지 사랑에 성실했던 임금님의 이야기를 통해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에의 꿈이 담겼는데 이 시의 정교함이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그 애틋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무대 ‘툴레’가 지구 최북단에 있다는 가상의 섬이다. 즉 지상의 현실에서는 있기 어려운 이야기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쉬이 비극으로 전복되기도 하고 사랑의 끝의 단초를 볼 수도 있다.
일하는 소녀 그레트헨의 일상은 단 한 편의 노래 ‘물레가의 그레트헨’으로 두드러지게 각인된다. 일하는 소녀가 부르는 노래답게 단순하고 반복이 많은 가사인데 일상과 시작되는 사랑의 감정이 잘 담겨서 아무런 구체적 일상의 묘사 없이도 연극의 한 장면을 대신한다.(슈베르트는 이 노래를 작곡하면서 돌아가는 물레 소리까지 담아 효과를 높였다.)
사랑의 구체적 사연은 전체적으로 과감한 컷을 통하여 어렴풋이 암시만 돼 있다.(아들을 잃은 고통의 성모상 앞에서 그레트헨이 홀로 하는 기도 한 편 역시 한 장면이 돼 그사이 전복된 사랑의 설렘의 현황을 암시하고 있다.) “굽어보소서 그대 고통 많으신 이 저의 괴로움을…”. 사랑이 봉착한 괴로움이 담겼지만 노래가 아름답다. 이 노래는 나중에 ‘파우스트’ 2부 끝에서 잔상처럼 되풀이된다. “고통 많으신” 성모가 “영광 많으신”으로만 바뀌어 장려한 장면으로 승화되며.
가장 심금을 울리는 노래는 1부 마지막 ‘감옥’ 장면의 시작 부분에 있다. 작품에서 자세한 묘사는 없는 사랑의 비극은 어머니와 오빠의 죽음에 이어 영아 살해로 암시돼 있다. 고통으로 광녀가 된 그레트헨이 감옥에 갇혀 “울 엄마 날 죽였어 울 아빠 날 먹었어…” 하는 끔찍한 동요를 부른다. 자신이 죽인 아이가 자신을 향하여 부르는 노래를 자기가 부름으로써 광녀의 고통이 세차게 전달된다.(혼전 관계가 용인되지 않는 시대에 아이를 낳은 여성은 피임도 없고 기를 수도 없으니 죽이곤 했으며 그런 여성은 괴테의 시대까지도 ‘영아살해녀’라는 이름으로 공개 처형당했다. 젊은 변호사 괴테가 그런 처형 장면을 보았고 그 인상은 지극히 비극적이되 참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감옥 밖으로 꺼내려는 파우스트와는 달리 정신이 혼미하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그레트헨의 모습이 주는 인상은 압도적이다.
작품 ‘파우스트’는 전체가 12111행의 정교한 운문일 뿐더러 표나게 많은 노래가 담겨 있다. 특히 2부는 가극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러하다. 많은 음악가들이 작곡을 더했다. 작곡 이전에 그런 시편들은 그 자체에 이미 음악도 품고 있다. 극대치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언어인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시공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는 것일 게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그런데 그 애틋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무대 ‘툴레’가 지구 최북단에 있다는 가상의 섬이다. 즉 지상의 현실에서는 있기 어려운 이야기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쉬이 비극으로 전복되기도 하고 사랑의 끝의 단초를 볼 수도 있다.
일하는 소녀 그레트헨의 일상은 단 한 편의 노래 ‘물레가의 그레트헨’으로 두드러지게 각인된다. 일하는 소녀가 부르는 노래답게 단순하고 반복이 많은 가사인데 일상과 시작되는 사랑의 감정이 잘 담겨서 아무런 구체적 일상의 묘사 없이도 연극의 한 장면을 대신한다.(슈베르트는 이 노래를 작곡하면서 돌아가는 물레 소리까지 담아 효과를 높였다.)
사랑의 구체적 사연은 전체적으로 과감한 컷을 통하여 어렴풋이 암시만 돼 있다.(아들을 잃은 고통의 성모상 앞에서 그레트헨이 홀로 하는 기도 한 편 역시 한 장면이 돼 그사이 전복된 사랑의 설렘의 현황을 암시하고 있다.) “굽어보소서 그대 고통 많으신 이 저의 괴로움을…”. 사랑이 봉착한 괴로움이 담겼지만 노래가 아름답다. 이 노래는 나중에 ‘파우스트’ 2부 끝에서 잔상처럼 되풀이된다. “고통 많으신” 성모가 “영광 많으신”으로만 바뀌어 장려한 장면으로 승화되며.
가장 심금을 울리는 노래는 1부 마지막 ‘감옥’ 장면의 시작 부분에 있다. 작품에서 자세한 묘사는 없는 사랑의 비극은 어머니와 오빠의 죽음에 이어 영아 살해로 암시돼 있다. 고통으로 광녀가 된 그레트헨이 감옥에 갇혀 “울 엄마 날 죽였어 울 아빠 날 먹었어…” 하는 끔찍한 동요를 부른다. 자신이 죽인 아이가 자신을 향하여 부르는 노래를 자기가 부름으로써 광녀의 고통이 세차게 전달된다.(혼전 관계가 용인되지 않는 시대에 아이를 낳은 여성은 피임도 없고 기를 수도 없으니 죽이곤 했으며 그런 여성은 괴테의 시대까지도 ‘영아살해녀’라는 이름으로 공개 처형당했다. 젊은 변호사 괴테가 그런 처형 장면을 보았고 그 인상은 지극히 비극적이되 참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감옥 밖으로 꺼내려는 파우스트와는 달리 정신이 혼미하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그레트헨의 모습이 주는 인상은 압도적이다.
작품 ‘파우스트’는 전체가 12111행의 정교한 운문일 뿐더러 표나게 많은 노래가 담겨 있다. 특히 2부는 가극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러하다. 많은 음악가들이 작곡을 더했다. 작곡 이전에 그런 시편들은 그 자체에 이미 음악도 품고 있다. 극대치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언어인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시공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는 것일 게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