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호의 키워드로 읽는 광주·전남 미술사] 고려청자 우아함·분청사기 소박美…도자에 담긴 ‘시대 미감’
[고려 청자와 조선 분청사기]
■ 강진 고려청자
12세기엔 품격·13세기엔 초탈의 세계 담아
장식·기교 간소화되는 미술사 흐름과 유사
도공 개개인 미적 감각, 남도 미술 중요 자산
■ 남도 분청사기
조선 초 15세기 유행했던 도자사 특징 뚜렷
■ 강진 고려청자
12세기엔 품격·13세기엔 초탈의 세계 담아
장식·기교 간소화되는 미술사 흐름과 유사
도공 개개인 미적 감각, 남도 미술 중요 자산
■ 남도 분청사기
조선 초 15세기 유행했던 도자사 특징 뚜렷
![]() 15세기 조화분청항아리
<무등산 분청사기 가마터> |
어느 지역이나 특유의 기질이나 미적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예향 남도라 일컫는 광주·전남 예술의 본바탕과 특질은 무얼까. 요즘이야 워낙 다원화된 시대라 다종다양한 예술세계가 동시에 펼쳐지고 있지만, 한동안은 ‘호남화풍’ 또는 ‘남도양식’이라 하는 특정 경향이 지역미술계에 집단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과 20~30여 년 전에 비하면 지금의 문화풍토나 주류양식은 전혀 달라져 있다. 그러다 보니 지역문화의 정체성이 흐트러졌다거나 주된 전통의 맥이 흐려졌다고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 시대마다 유행 문화가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지역문화 전체를 하나의 맥락으로 일원화할 수 없다.
남도의 도자 역사는 이 땅 주류문화의 시대별 변화를 뚜렷이 보여주는 예다. 강진 대구면을 중심으로 한 고려청자와, 광주 무등산이나 고흥 운대리 등지에서 제작된 조선 초기 분청사기는 같은 남도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200~300년 시대의 간극만큼이나 전혀 다른 기법과 미감을 보여준다. 그릇은 일상 삶과 함께하는 생활 기물이지만, 도자기로 보면 심미적 완상취미 대상으로서 전혀 다른 가치를 갖는다. 즉, 격이 높은 도자기는 문인사회나 문화주도층의 정신적 여기와 연결된 완상품이기도 해서 이는 시대 미감의 반영이자 정신문화의 한 표본으로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아한 품격의 강진 고려청자
고려시대 때 흥성했던 강진 청자는 순청자와 상감청자, 상형청자 등으로 모양을 달리하고, 시기별로 도자기 표면장식기법도 다르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청자매병에서도 시기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를테면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 무렵에는 일정 간격으로 배치한 원 안에 구름과 학이나 국화·모란무늬를 넣어 두르고 그 사이사이에 구름과 학 무늬를 고른 간격으로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반복된 도상 구성이면서도 하나하나 정교하게 새기고 채워 넣은 정제된 미감이 현대의 기계적인 패턴과는 격이 다르고, 거기에 청자의 이른바 비취빛까지 어우러져 귀티 나는 우아함을 갖추고 있다.
그에 비해 같은 상감청자매병이면서도 고려 후기인 13세기 이후로는 장식적인 반복 무늬로 전면을 채우기보다 도자기 표면을 화폭 삼아 초화류나 매죽을 회화성 있게 넣기도 하고, 무한허공 같은 넓고 푸른 여백 속에 노니는 학과 구름을 드문드문 배치하기도 한다. 작은 도자기 하나에 그야말로 속된 욕심을 벗어버린 대자유의 세계를 담아낸 것이다. 대자연 속 걸림 없는 초탈의 세계를 도자기를 완상하며 정신적 소요유(逍遙遊)를 누리고자 한 향유층의 취향과 도공들의 미감이 서로 통하여 그만한 품격의 귀물들을 만들어내었다고 본다. 물론 기형에서 매병의 어깨선 꺾임이 훨씬 완만하게 곡선이 커지고 그래서 위로 상승하는 힘이 아래로 처지는 듯한 변화도 함께 나타난다. 이처럼 시대가 뒤로 갈수록 빼곡히 채우는 장식이나 기교를 간소화하고 거르는 것은 같은 상감기법인 고려 은입사(銀入絲) 금속공예를 비롯, 고려 불화나 부도 등 넓게 보면 미술사의 전반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상감기법에서 그릇에 들이는 정성과 미적 완성도는 상형청자의 조형성에서도 마찬가지다. 상형청자는 몇 겹 몇 단의 조형적 구성을 갖춘 연꽃모양 향로를 비롯하여 해태, 어룡, 천도복숭아, 원숭이, 오리, 거북, 동자 등 현실계와 상상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도자기 형상을 빚었다. 그것은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보다는 심미적 즐거움과 정신적 사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완상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의 미술 전공자나 전문작가 개념과는 다른 무지렁이 도공들이 단지 기능인으로서 생업만이 아닌 일에 심취하여 미적 감각을 풀어낸 창조적 솜씨라는 점에서 남도 미술문화의 멋스러운 중요 자산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무심 초탈한 소박미의 남도 분청사기
도자기에서 장식성으로부터 초탈의 미로 흐르는 경향은 조선 초기 분청사기에서 더 뚜렷이 나타난다. 분청사기는 조선 초 15세기에 유행했던 한국 도자사의 특징 있는 문화자원이다. 분청사기는 말 그대로 청자토에 분장을 바른 것처럼 이해할 수도 있고, 상감청자의 퇴화된 형태로 보기도 한다.
분청사기는 가마터의 분포 위치에서도 청자와는 차이를 보인다. 고려청자는 강진 대구면 사당리·용운리, 해남 산이면 진산리, 부안 보안면 유천리·진서면 진서리, 보령 전북면 사호리, 인천 서구 경서동 등 주로 바닷가에 있다. 그에 비하면 분청사기 가마터는 전국 곳곳, 바닷가뿐 아니라 내륙에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광주 무등산 충효동과 고흥 운대리, 무안 사천리·대치리, 영암 상월리, 부안 우동리, 공주 계룡산 학봉리, 연기(세종) 달전리, 용인 고안리, 창원 진해구 두동 등이 그 예다. 그만큼 분청사기는 청자보다 더 널리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93년 국립광주박물관의 대대적인 발굴조사 때 현장에서 본 무등산분청사기 가마터와 그 주변에 쌓여 있는 엄청난 파편들은 얼마나 많은 양의 다양한 그릇들이 빚어졌을지를 짐작하게 했다.
분청사기는 도자기 색부터가 청자의 맑고 그윽한 비취색 대신 태토색이 비치는 탁한 회녹색이거나 흰 분장토가 거칠게 발라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릇 모양과 무늬도 정제된 정형보다는 틀이 깨지면서 투박하고 자유로워진다. 초기에는 매병 형태 등 고려청자의 뒤를 이으면서도 꼼꼼하게 손이 많이 가는 상감기법 대신 꽃무늬 도장을 도자기 전면에 줄지어 눌러 찍고 그 패인 홈에 백토를 채워 굽는 인화분청이 많았다. 설령 상감기법을 따르더라도 훨씬 간략한 그림으로 새겨넣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점차 도자기 표면을 빠르고 간편하게 장식하는 기법들을 이용하면서 그릇 모양도 투박해지고 무늬도 거칠면서 손길 흔적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남기는 경우들이 일반적이다.
분청사기는 무늬를 넣는 분장법에서 청자 백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꽃무늬 도장 무늬인 인화분청 외에도 백토분장을 바른 뒤 단순 큼직하게 무늬를 그려 넣고 그 바깥을 긁어내는 박지분청, 몇 가닥 선으로 재빠르게 그림을 긁어 그리는 조화분청, 산화철분 유약으로 먹그림처럼 그려 넣는 철화 또는 철회분청, 분장토를 묻힌 넓은 솔로 빠르게 휘돌려 스친 흔적을 남기는 귀얄분청, 아무것도 그리는 것 없이 그냥 그릇을 거꾸로 잡고 분장토 통에 살짝 담갔다 꺼내 흘러내리는 무늬를 남기는 덤벙분청 등이다. 인화분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엇에건 얽매임 없이 대범하고 자유롭게 도자기 표면을 대하는 무작위적 경지인데, 이것이 바로 고려청자와 대조되는 분청사기 특유의 무심한 멋이다.
주목할 점은 이런 미완인 듯 불성실해 보이는 거칠고 투박한 그릇들을 시골 산동네의 막그릇이 아닌 지식인사회나 상류사회에서 심미적 완상용이나 정신적 초탈을 위한 다구(茶具)로 애용하였다는 것이다. 성리학의 유행기 유교 정신에 따라 인위적 꾸밈을 멀리하거나, 자연을 귀의처로 삼는 도가의 무위사상이 ‘자연스러움’을 더할 나위 없는 경지로 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기법이나 기술에 의존키보다 몸에 체화된 숙련된 기능과 정신의 자유로움으로 무심한 행위 흔적을 담아낸 분청사기들을 자연 귀의와 탈속으로 이끄는 매개물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장식을 넣더라도 기교가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고급스러움을 갖추기는 기법의 숙련만으로 되지 않는다. 또한 손길을 적절히 덜거나 아예 무심하게 비워버리면서 미적 품격을 담는다는 것도 그만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나 가능하다. 고려청자나 분청사기는 이를 필요로 하는 수요층은 같아도 시대문화 배경과 기법, 품격은 전혀 다르다. 그 품격이 단지 그릇이나 기물이 아닌 예술품으로 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대 도자에서도 청자나 분청사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특히 분청사기 기법은 회화적이기도 해서 거친 반추상이나 비정형, 미니멀 양식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의도적인 비움이나 일탈, 형식의 파괴가 아닌 생각과 행위와 기법이 무심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가 멋스럽고 격조 있는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바탕이라고 본다. 품격 있고 귀티 나는 꾸밈과 무심 무위한 초탈의 미, 남도의 멋은 시대 따라 여러 모습으로 드러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한국미술사 전공.
▲ (재)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정책기획실장 역임
▲‘남도미술의 숨결’, ‘광주 현대미술의 현장’ 등 출간
![]() 12세기 운학문상감청자매병
<간송미술관 소장> |
![]() 13세기 운학문상감청자매병
<강진 청자박물관 소장> |
고려시대 때 흥성했던 강진 청자는 순청자와 상감청자, 상형청자 등으로 모양을 달리하고, 시기별로 도자기 표면장식기법도 다르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청자매병에서도 시기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를테면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 무렵에는 일정 간격으로 배치한 원 안에 구름과 학이나 국화·모란무늬를 넣어 두르고 그 사이사이에 구름과 학 무늬를 고른 간격으로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반복된 도상 구성이면서도 하나하나 정교하게 새기고 채워 넣은 정제된 미감이 현대의 기계적인 패턴과는 격이 다르고, 거기에 청자의 이른바 비취빛까지 어우러져 귀티 나는 우아함을 갖추고 있다.
![]() 15세기 인화 분청접시
<광주읍성터 출토> |
![]() 15세기 인화 분청접시
<고흥 운대리 2호 가마터> |
![]() 15세기 귀얄 분청대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도자기에서 장식성으로부터 초탈의 미로 흐르는 경향은 조선 초기 분청사기에서 더 뚜렷이 나타난다. 분청사기는 조선 초 15세기에 유행했던 한국 도자사의 특징 있는 문화자원이다. 분청사기는 말 그대로 청자토에 분장을 바른 것처럼 이해할 수도 있고, 상감청자의 퇴화된 형태로 보기도 한다.
분청사기는 가마터의 분포 위치에서도 청자와는 차이를 보인다. 고려청자는 강진 대구면 사당리·용운리, 해남 산이면 진산리, 부안 보안면 유천리·진서면 진서리, 보령 전북면 사호리, 인천 서구 경서동 등 주로 바닷가에 있다. 그에 비하면 분청사기 가마터는 전국 곳곳, 바닷가뿐 아니라 내륙에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광주 무등산 충효동과 고흥 운대리, 무안 사천리·대치리, 영암 상월리, 부안 우동리, 공주 계룡산 학봉리, 연기(세종) 달전리, 용인 고안리, 창원 진해구 두동 등이 그 예다. 그만큼 분청사기는 청자보다 더 널리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93년 국립광주박물관의 대대적인 발굴조사 때 현장에서 본 무등산분청사기 가마터와 그 주변에 쌓여 있는 엄청난 파편들은 얼마나 많은 양의 다양한 그릇들이 빚어졌을지를 짐작하게 했다.
![]() 광주역사민속박물관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에서는 다양한 분청사기를 만날 수 있다. <조인호 대표 제공> |
분청사기는 무늬를 넣는 분장법에서 청자 백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꽃무늬 도장 무늬인 인화분청 외에도 백토분장을 바른 뒤 단순 큼직하게 무늬를 그려 넣고 그 바깥을 긁어내는 박지분청, 몇 가닥 선으로 재빠르게 그림을 긁어 그리는 조화분청, 산화철분 유약으로 먹그림처럼 그려 넣는 철화 또는 철회분청, 분장토를 묻힌 넓은 솔로 빠르게 휘돌려 스친 흔적을 남기는 귀얄분청, 아무것도 그리는 것 없이 그냥 그릇을 거꾸로 잡고 분장토 통에 살짝 담갔다 꺼내 흘러내리는 무늬를 남기는 덤벙분청 등이다. 인화분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엇에건 얽매임 없이 대범하고 자유롭게 도자기 표면을 대하는 무작위적 경지인데, 이것이 바로 고려청자와 대조되는 분청사기 특유의 무심한 멋이다.
![]() 광주 북구 금곡동 무등산 분청사기 요지(가마터). <조인호 대표 제공> |
어떤 장식을 넣더라도 기교가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고급스러움을 갖추기는 기법의 숙련만으로 되지 않는다. 또한 손길을 적절히 덜거나 아예 무심하게 비워버리면서 미적 품격을 담는다는 것도 그만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나 가능하다. 고려청자나 분청사기는 이를 필요로 하는 수요층은 같아도 시대문화 배경과 기법, 품격은 전혀 다르다. 그 품격이 단지 그릇이나 기물이 아닌 예술품으로 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대 도자에서도 청자나 분청사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특히 분청사기 기법은 회화적이기도 해서 거친 반추상이나 비정형, 미니멀 양식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의도적인 비움이나 일탈, 형식의 파괴가 아닌 생각과 행위와 기법이 무심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가 멋스럽고 격조 있는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바탕이라고 본다. 품격 있고 귀티 나는 꾸밈과 무심 무위한 초탈의 미, 남도의 멋은 시대 따라 여러 모습으로 드러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한국미술사 전공.
▲ (재)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정책기획실장 역임
▲‘남도미술의 숨결’, ‘광주 현대미술의 현장’ 등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