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재들은 좀처럼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을까 - 이병우 우아포인트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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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 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기자단의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결국 질문권은 옆자리에 있던 중국 기자에게 넘어갔다. 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질문하는 데는 서툰 사회, 스스로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문화가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EBS는 이 해프닝을 주제로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다.
애덤 그랜트의 책 ‘오리지널스’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수재들은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나서는 일이 드물까?” 그는 심리학자 엘렌 워너의 연구를 인용하며 설명한다. “신동들 가운데 아주 극소수만이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창의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성공하고 조직 내에서 지도자가 되지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왜일까? 그들은 주어진 규칙과 구조 안에서 ‘잘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불합리한 규칙에 질문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이득을 얻는 방식을 더 잘 안다. 여기에 성공하겠다는 욕구가 강하면 나만의 독특한 무엇을 하기 보다는 성공이 보장된 길을 택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장 난 의료체계를 바꾸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된다. 또한 불합리한 법을 바꾸기보다 그 법에 걸린 고객을 잘 변호해주는 ‘능력 있는 변호사’가 된다.
역사적으로 변화에 앞장선 위대한 인물들 중에서도 스스로 결정하기 보다는 타인의 간청과 설득에 떠밀려 나섰던 경우도 적지 않다. 조지 워싱턴은 당시 여러 사업을 운영하고 있어서 처음엔 군 총사령관직을 맡지 않으려고 했다. 워싱턴은 나중에 “그 일을 피하려고 온 힘을 다 쏟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은 목표가 대학 총장이 되는 것이어서 처음엔 민권운동 참여를 주저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육법당’이라는 말이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법대 출신 엘리트들이 집권 여당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가 최고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 엘리트들은 정권의 명령에 비판 없이 따르고 권위주의 체제 유지에 기여했다. 비판과 대안이 실종된 그 시기의 정책은 종종 국민과 동떨어졌고 권력은 견제 받지 못한 채 오만해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인물들 역시 대부분 수재들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 승승장구한 엘리트들이었다. 그러나 최순실의 부당한 개입 앞에서 그들은 침묵했다. “이건 부당한 지시 아닙니까?” 라고 질문하지 않았다. ‘토’를 다는 대신 잘 받아쓰고 잘 실행했다. 그리고 사태가 터지자 모두 “나는 몰랐다”,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며 고개를 돌렸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발령과 탄핵 심판 과정에서도 같은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그토록 유능한 인재들이 반헌법적인 조치에 동조하고 상식 밖의 논리를 펼치면서 기득권 지키기에 전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입법 취지보다는 조항 속 허점을 파고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주어진 규칙을 잘 이해하고 그 체제 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우대받는 시대였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위기를 겪고 있다. 똑똑한 사람이 필요한 건 맞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는 똑똑함, 생각 없는 순응, 용기 없는 지성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에 그치는 ‘수재’들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진정한 변화를 이끄는 인재라고 생각한다.
왜일까? 그들은 주어진 규칙과 구조 안에서 ‘잘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불합리한 규칙에 질문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이득을 얻는 방식을 더 잘 안다. 여기에 성공하겠다는 욕구가 강하면 나만의 독특한 무엇을 하기 보다는 성공이 보장된 길을 택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장 난 의료체계를 바꾸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된다. 또한 불합리한 법을 바꾸기보다 그 법에 걸린 고객을 잘 변호해주는 ‘능력 있는 변호사’가 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육법당’이라는 말이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법대 출신 엘리트들이 집권 여당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가 최고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 엘리트들은 정권의 명령에 비판 없이 따르고 권위주의 체제 유지에 기여했다. 비판과 대안이 실종된 그 시기의 정책은 종종 국민과 동떨어졌고 권력은 견제 받지 못한 채 오만해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인물들 역시 대부분 수재들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 승승장구한 엘리트들이었다. 그러나 최순실의 부당한 개입 앞에서 그들은 침묵했다. “이건 부당한 지시 아닙니까?” 라고 질문하지 않았다. ‘토’를 다는 대신 잘 받아쓰고 잘 실행했다. 그리고 사태가 터지자 모두 “나는 몰랐다”,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며 고개를 돌렸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발령과 탄핵 심판 과정에서도 같은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그토록 유능한 인재들이 반헌법적인 조치에 동조하고 상식 밖의 논리를 펼치면서 기득권 지키기에 전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입법 취지보다는 조항 속 허점을 파고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주어진 규칙을 잘 이해하고 그 체제 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우대받는 시대였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위기를 겪고 있다. 똑똑한 사람이 필요한 건 맞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는 똑똑함, 생각 없는 순응, 용기 없는 지성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에 그치는 ‘수재’들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진정한 변화를 이끄는 인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