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동학군, 1027명 희생 첫 확인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논문서 밝혀
![]() 10월 30일 나주시 죽림동 나주역시민공원에서 일본 동학기행단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 제막식’이 열렸다 |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에서 1027명에 달하는 동학군이 희생됐다는 연구 결과가 처음으로 나왔다.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고려대 사학과 박사)은 26일 ‘나주동학농민혁명의 학살자에 대한 연구-나주목사 민종렬 연구’ 논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논문은 나주동학농민혁명 사죄비 건립추진위원회 주최로 27일 나주시 나빌레라 소극장에서 열리는 ‘나주동학 농민혁명 학술대회’에서 발표된다.
박 위원은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목에서 희생된 동학군은 62명, 나주 동학농민혁명 5대 전투 당시 희생된 동학군 735명을 합하면 관군에 의해 희생당한 동학군의 수는 모두 797명에 달한다”며 “이후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에 의해 230여명의 동학농민군이 처형됐다”고 밝혔다.
박 위원은 “나주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은 모두 1027명이며, 일본군에 희생된 농민군을 제외하고는 모두 1893년 11월 20일 나주 목사(牧使)로 부임한 민종렬에 의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이번 연구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에 의해 희생된 나주 동학농민군의 규모가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차 동학혁명으로 불리는 나주의 5대 전투(서성문 전투, 광주 침산·사창 전투, 용진산 전투, 장등참·고막포 전투, 남산촌 전투)에서는 농민군의 저항이 격렬해 피해가 더 컸다.
동학군의 무기는 죽창, 몽둥이, 창 등이 전부였다. 이 때문에 관군의 대완포(쇠나 돌로 만든 둥근 탄알을 넣어 쏘는 화포)나 장대포, 천보조총 등에 속수무책이었다는 사실이 ‘갑오군정 실기’등의 기록으로 확인됐다.
관군에 붙잡힌 동학군은 참수형, 화형, 총살 뿐 아니라 장등참·고막포 전투에서는 발로 짓밟혀 처참하게 죽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관군 부상자나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박 위원은 분석했다.
/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고려대 사학과 박사)은 26일 ‘나주동학농민혁명의 학살자에 대한 연구-나주목사 민종렬 연구’ 논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논문은 나주동학농민혁명 사죄비 건립추진위원회 주최로 27일 나주시 나빌레라 소극장에서 열리는 ‘나주동학 농민혁명 학술대회’에서 발표된다.
박 위원은 “나주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은 모두 1027명이며, 일본군에 희생된 농민군을 제외하고는 모두 1893년 11월 20일 나주 목사(牧使)로 부임한 민종렬에 의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2차 동학혁명으로 불리는 나주의 5대 전투(서성문 전투, 광주 침산·사창 전투, 용진산 전투, 장등참·고막포 전투, 남산촌 전투)에서는 농민군의 저항이 격렬해 피해가 더 컸다.
동학군의 무기는 죽창, 몽둥이, 창 등이 전부였다. 이 때문에 관군의 대완포(쇠나 돌로 만든 둥근 탄알을 넣어 쏘는 화포)나 장대포, 천보조총 등에 속수무책이었다는 사실이 ‘갑오군정 실기’등의 기록으로 확인됐다.
관군에 붙잡힌 동학군은 참수형, 화형, 총살 뿐 아니라 장등참·고막포 전투에서는 발로 짓밟혀 처참하게 죽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관군 부상자나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박 위원은 분석했다.
/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