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로 보는 세상
![]() 최 유 준 전남대 호남학과 교수 |
미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라는 책에는 흥미로운 실험이 예시되고 있다. 원숭이와 팬더 그리고 바나나가 그려진 그림을 보여 주면서 관계있는 것끼리 연결시켜 보라고 했더니, 대체로 미국과 서유럽 출신 학생들은 원숭이와 팬더를, 동아시아 출신 학생들은 대부분 원숭이와 바나나를 서로 짝 지었다고 한다. 서양 학생들은 원숭이와 팬더가 같은 ‘동물’이라는 점에 주목한 반면, 동아시아 학생들은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여러 다양한 실험 결과들을 토대로 니스벳은 서양인들이 세상을 ‘명사’로 보는 반면, 동양인(동아시아인)들은 세상을 ‘동사’로 본다고 결론짓는다. 즉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훨씬 더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이분법적 도식화의 위험이 있지만, 여러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한 니스벳의 분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다만 그것을 곧바로 동서양의 차이로 봐야 할지, 서양의 근대 이후 과학적 합리주의가 스며든 문화적 차이 정도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다. 세상을 명사로 보는 태도가 서양의 고대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하지만, 그 결정적 측면은 근대 이후의 과학적 사고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가 서양인임에도 명사적 세계관의 서양보다 동사적 세계관의 동양의 손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서양의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자기 성찰이기도 할 것이다.
명사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판단하는 주체로부터 객체를 엄격히 분리하여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합리적 태도를 뜻한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의 견지에서 ‘나’라고 하는 (대)명사에 포착된 모든 세계는 사물(명사)화되어 파악된다. 근대 자본주의는 명사적 세계관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자본주의적 교환가치(가격 매기기)에 의해 예컨대 인간의 추상적 ‘노동’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명사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서양의 명사적-과학적-합리적인 세계관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근대 이후 ‘사물화’가 초래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근대 비판의 관점에서 서양인들 스스로 관계론적 사고(동사적 세계관)로의 전환을 요구한 것 역시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특히 전후세대가 성장한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는 관계론적 사고에 대한 다양한 사유와 실천이 이루어졌는데, 그 핵심에 미학이 있었다. 서양 근대예술이야말로 명사적 세계관의 정수였기 때문인데, 미술관에 전시된 회화나 조각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라 할 만한 음악조차 ‘오선보에 기록된 불멸의 작품’이라는 형식의 명사로서 이해되었다. 예술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이해한다는 것은 ‘작품’보다는 보고 듣고 느끼는 행위, 상호 관계 맺기의 참여 행위를 더 중시하는 것이다. 즉흥 연주나 즉흥 퍼포먼스의 경우 ‘작품’이 없어도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 맺기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작품이 없다면 작가도 없을 터,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천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을 ‘작품’(명사)보다는 ‘관계 맺기의 참여 행위’(동사)로서 본다는 것은 작가, 연주자, 감상자를 모두 예술적 창조 과정의 동등한 참여자로 간주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 전환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장소의 재발견’이다. 작품보다는 참여 행위에 초점을 맞출 경우, ‘누가 참여하는가’ 라는 물음과 함께 ‘어디에서 참여가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 또한 부각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공미술, 혹은 ‘장소특정적 미술’의 아이디어 또한 1960년대 서양의 관계론적 사고 전환(흔히 ‘문화적 전환’과 ‘수행적 전환’으로 일컬어지는)에서 비롯된 ‘장소의 재발견’과 관련이 있다.
일찍이 프랑스 68혁명이 광범위한 평등주의 교육 체제 혁신을 이루며 책 속에 저장된 ‘명사로서의 지식’을 넘어 ‘동사로서의 체험 학습’을 중시한 것도 교육계에서의 관계론적-동사적 전환이었다. 이렇듯 여러 면에서 20세기의 서양인들도 ‘동사로 세상 보기’의 다양한 성찰적 차원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최근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 대한 개별 국민들의 대처에 있어서 대체로 동아시아인들이 서양인들에 비해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을 보면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가 새삼 옳은 듯하다. 그것이 이른바 ‘사회적 거리 두기’, 즉 일상적 관계 맺기와 참여를 유보하는 일과 관련된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그조차도 더 넓은 맥락의 관계 맺기를 위한 ‘동사로 세상 보기’의 지혜일 것이다.
자본주의적 교환가치(가격 매기기)에 의해 예컨대 인간의 추상적 ‘노동’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명사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서양의 명사적-과학적-합리적인 세계관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근대 이후 ‘사물화’가 초래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근대 비판의 관점에서 서양인들 스스로 관계론적 사고(동사적 세계관)로의 전환을 요구한 것 역시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특히 전후세대가 성장한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는 관계론적 사고에 대한 다양한 사유와 실천이 이루어졌는데, 그 핵심에 미학이 있었다. 서양 근대예술이야말로 명사적 세계관의 정수였기 때문인데, 미술관에 전시된 회화나 조각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라 할 만한 음악조차 ‘오선보에 기록된 불멸의 작품’이라는 형식의 명사로서 이해되었다. 예술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이해한다는 것은 ‘작품’보다는 보고 듣고 느끼는 행위, 상호 관계 맺기의 참여 행위를 더 중시하는 것이다. 즉흥 연주나 즉흥 퍼포먼스의 경우 ‘작품’이 없어도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 맺기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작품이 없다면 작가도 없을 터,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천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을 ‘작품’(명사)보다는 ‘관계 맺기의 참여 행위’(동사)로서 본다는 것은 작가, 연주자, 감상자를 모두 예술적 창조 과정의 동등한 참여자로 간주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 전환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장소의 재발견’이다. 작품보다는 참여 행위에 초점을 맞출 경우, ‘누가 참여하는가’ 라는 물음과 함께 ‘어디에서 참여가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 또한 부각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공미술, 혹은 ‘장소특정적 미술’의 아이디어 또한 1960년대 서양의 관계론적 사고 전환(흔히 ‘문화적 전환’과 ‘수행적 전환’으로 일컬어지는)에서 비롯된 ‘장소의 재발견’과 관련이 있다.
일찍이 프랑스 68혁명이 광범위한 평등주의 교육 체제 혁신을 이루며 책 속에 저장된 ‘명사로서의 지식’을 넘어 ‘동사로서의 체험 학습’을 중시한 것도 교육계에서의 관계론적-동사적 전환이었다. 이렇듯 여러 면에서 20세기의 서양인들도 ‘동사로 세상 보기’의 다양한 성찰적 차원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최근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 대한 개별 국민들의 대처에 있어서 대체로 동아시아인들이 서양인들에 비해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을 보면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가 새삼 옳은 듯하다. 그것이 이른바 ‘사회적 거리 두기’, 즉 일상적 관계 맺기와 참여를 유보하는 일과 관련된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그조차도 더 넓은 맥락의 관계 맺기를 위한 ‘동사로 세상 보기’의 지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