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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바다를 건너간 마한의 신문물
마한 신문물은 대한해협 건너 일본열도로 파급되었다
2020년 11월 04일(수) 07:30
규슈 사가(佐賀) 요시노가리 유적 복원지역(광주 신창동 유적 전체가 발굴되면 이와같은 마을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지난 글 <20>에서는 흔히 동이로 표현되는 중국 동부지역에서 황해를 건너 마한으로 파급되었던 신문물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한의 신문물은 일본으로 전해졌고 마한 다음에는 백제로 이어졌다. 마한의 문화는 백제에 앞서 일본에 전해졌지만 그동안 백제 문화에 묻혀 잘 드러나지 못하였다.



후쿠오카 이다츠케(板付) 야요이시대 마을(환호를 두른 마을 옆에서 논과 목제 농구가 발굴되었다)
◇일본 야요이시대의 시작

일본은 신석기시대 이래 주변지역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였고 이를 변용시키면서 발전해 나갔다. ‘총·균·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기원전 400년경 한국에서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이주한 사람들이 야요이시대를 열었음을 인정하였다.

고대 일본의 국가 형성과정에서는 한국, 특히 백제의 영향이 컸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보면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역에 백제 문물이 확산되는 것은 그렇게 이른 시기가 아니었으며 지금까지 백제의 것으로 인식되어 왔던 이른 시기의 고고학 자료들은 대부분 마한에 해당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규슈 아사쿠라(朝倉) 히가시오타미네(東小田峰) 1호 분구묘(일본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분구묘이며 8인의 매장 주체부가 남아있다)
◇마한 이주민의 살림터와 무덤

일본에서 확인되는 고고학 자료 가운데 마한인의 이주를 잘 반영하는 자료는 일상 생활과 직결되는 사주식(四柱式) 마한계 주거지이다. 4개의 기둥으로 지탱되는 튼튼한 집 안에 부뚜막이 설치되어 요리와 난방을 겸하는 구조이다.

부뚜막에는 솥을 걸칠 수 있는데 함께 출토되는 시루는 신석기시대 이래 수천 년 지속되었던 끓이는 조리법이 찌는 조리법으로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부뚜막을 이용한 난방 역시 바닥 중앙을 파서 만든 기존 화덕 난방과는 크게 다르며 내부 공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규슈 후쿠오카시 니시진마찌(西新町) 유적에서는 3세기 후반에 시작되는 마한계 주거지에서 점토로 만든 부뚜막이 확인되었는데 충청~전라지역 마한 계통의 조족문토기가 출토되었다. 기나이(畿內) 지역에서는 5세기대부터 마한계 주거지가 확인되고 있다.

마한과 관련된 무덤은 분구묘이다. 야요이시대 규슈 북부에서 시작된 분구묘는 기나이 지역을 거쳐 전국으로 파급되었는데 마한의 분구묘와 기본적인 구조 뿐만 아니라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상통하는 것이다. 앞으로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일본 분구묘는 마한의 분구묘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기나이 지역에서는 가와치(河內) 동북부에서 분구묘가 성행하였는데 이 지역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마한과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확인되는 곳이다.



시라이 가츠야가 정리한 마한 백제 토기의 시기별, 지역별 분포도(마한토기는6세기까지규슈지역을중심으로확인되고, 백제토기는 5세기후엽부터 기나이 지역을 중심으로 학인됨을 알 수 있다)
◇고대 일본의 사회 변화

고대 일본의 사회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國)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후경의 야요이시대 중기에 나타난 국은 단위지역별 정치조직이라고 하겠는데 수장층의 무덤에서는 흔히 세형동검, 다뉴세문경 등 한국계 청동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후한서’에 따르면 2세기 후반경에 왜국대란(倭國大亂)이 일어났는데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히미코(卑彌呼)를 왕으로 추대하자 사회가 안정을 찾았다고 하였다. 야마타이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규슈설과 기나이설이 있지만 당시 일본열도의 선진지역은 규슈였다. 사가(佐賀)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이 중심이었다가 점차 기나이 지역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3세기 중엽부터는 기나이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적 연합정권인 야마토가 태동하였으며 나라(奈良) 이소가미신궁(石上神宮)에서 발견된 백제 칠지도(七支刀)는 근초고왕대의 상호 관계를 말해 준다. 야마토 세력은 5세기 중엽부터 전국을 병합해 나갔는데 527년부터 529년까지 규슈에서 일어났던 이와이(磐井) 전쟁은 규슈 세력의 강력한 저항을 말해주고 있다.



기나이 지역의 조족문토기(새 발자국 형태의 무늬를 가진 마한계 토기, 오사카 매장문화재센터)
◇도래인, 귀화인, 도래계 이주민

야요이시대부터 시작되었던 한국인의 본격적인 이주는 7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규슈 지역에는 지석묘와 벼농사에 이어 마한과 관련된 자료들이 집중되어 있다. 오사카 일대는 중남부 지역에서 호서·호남의 마한 자료들이 나타나고, 북부 지역에서 영산강유역 마한 자료들이 많이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666년에 백제 유민 남녀 2000여명을 오우미(近江)로 이주시켰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도쿄대학 하니하라(埴原和郞) 교수는 야요이시대부터 7세기까지 약 1000년에 걸쳐 15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주한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고대 이주민은 712년 간행된 ‘고사기’에는 도래인(渡來人)으로 나오고, 720년 간행된 ‘일본서기’에는 귀화인(歸化人)으로 나온다. 도래인은 단순히 바다를 건너 온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귀화인은 왕권에 감화되어 왔다는 의미가 있다. 최근에는 모두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라 보고 ‘도래계 이주민’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바다를 건너 간 이주민들은 백제인과 가야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신라인도 섞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세기말-5세기초의 무기와 마구는 가야와 관련성이 높고, 5세기 전반에는 금동장식구, 마구 등 신라 유물도 보이다가 5세기 후반에는 대가야 유물이 많아진다. 6세기 이후에는 백제와 관련된 자료들이 압도적이 된다. 백제에서는 곤지와 같은 왕족과 아직기와 왕인을 비롯한 전문가 집단을 파견하였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후쿠오카 니시진마찌 유적에서 발굴된 마한계 토기 (규슈역사자료관)
◇마한인과 백제인

최근 일본에서는 마한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들이 백제와 구분되어 하나하나 확인되어 나가고 있다. 도쿄국립박물관의 시라이 가츠야(白井克也)는 조족문토기, 양이부호, 이중구연호는 충청과 전라지역에서 성행하였던 토기라는 점에서 백제토기와 구분하였다.

시라이 가츠야는 그동안 막연하게 백제계로 여겼던 토기들을 세분하여 3-4세기에는 마한A식이 규슈 북부로, 5세기에는 마한B식이 규슈 북부와 기나이 지역으로, 5세기후엽부터 백제식이 기나이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마한계 주민의 일본 이주는 크게 3차에 걸친 백제의 영역 확장과 관련되어 이루어졌다. 3세기 후엽에는 서울 강남지역에서 건국된 백제에 밀려 아산만권 마한인이 이주하였고, 4세기중반에는 충청 내륙지역과 전북지역 마한인이 이주하였으며, 6세기중엽에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마지막 마한인들이 이주하였던 것이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를 대표하는 인물은 왕인이다. 왕인은 백제에서 파견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한연구원장·前 전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