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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한의 금동신발
안전한 영혼 승천 염원 담은 특별한 부장용품
2020년 10월 07일(수) 00:00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금동신발. <2013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발굴>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지난 글 <18>에서는 마한의 금동관과 금동상투관을 살펴보았다. 금동관은 독자적인 마한 세력을 상징하는 왕관이라 할 수 있고, 금동상투관은 금동관과 세트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상투관 가운데 대단히 높은 신분을 말해주는 것임을 알았다.

금동신발 역시 매우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갖는 것이다. 2014년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되었던 금동신발은 여성이 그 주인공인 것으로 판명되어 마한의 수장 가운데에는 여성도 있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고구려 통구12호분 금동신발 (국립중앙박물관)
◇금동신발이란

금동신발은 죽은 사람에게 신겨주는 신발이다. 크기가 일반 신발보다 월등하게 크고 밑창에 수십개의 못이 박혀있을 뿐만 아니라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생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금동신발은 무덤에서만 출토되는 점에서 흔히 부장품으로 부르지만 부장용품이라 불러야 한다. 부장품은 금동관이나 금동상투관과 같은 일상용품이 부장된 것을 말하고, 부장용품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만 제작되었을 뿐 실생활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므로 구분되어야 한다.

금동신발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일본에서는 출토되지만 그 기원이 한국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고분에서 40여점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고대 한국을 대표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통구 삼실총 무사도 (여러 개의 못이 박힌 신발을 신고 있음)
◇죽은 사람에게 왜 금동신발을 신겼을까

죽은 사람이 신발을 신고 묻히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금동신발은 아무나 신고 묻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므로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신발 밑창에 20개가 넘는 못이 박혀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밑창에 수십개의 못을 박은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을 탄 무사가 밑창에 못이 박힌 신발을 신고 있어 일종의 무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에서는 못이 박혀있는 밑창만 출토되기도 한다. 밑창 둘레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어 원래 가죽이나 천이 연결되어 신발을 이루었던 것이 가죽이나 천은 부식되어 버렸음을 알 수 있다.

밑창에 여러 개의 못을 박은 특별한 신발은 고구려에서 실용품으로 만들어졌다가 점차 부장용품으로 변하면서 확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과정에서 부딪칠 수 있는 여러 장해 요소들을 잘 극복하기를 바라면서 신겨주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도교가 유행하였으므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왕을 비롯한 최고 지배세력은 사후에도 도교에서 추구하였던 신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을 것이므로 이를 위해서는 특별한 신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금동신발과 금동관 출토상황 (2006년 전남대학교 박물관 발굴)
◇금동신발, 금동관, 금동상투관의 관계

금동신발은 금동관이나 금동상투관과 함께 출토되는 경향이 있지만 늘 세트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가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금동관이나 금동상투관과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고, 금동신발만 출토되는 경우도 있다.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금동신발이 금화관식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금화관식은 비단 관모에 장착한 것으로서 금관이나 금동관과 마찬가지로 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백제권의 다른 지역에서는 금동신발과 금동상투관이 각각 혹은 함께 출토될 뿐 금관이나 금동관은 출토되지 않는데 이는 그 주인공들이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세 가지가 모두 출토된 것은 그 주인공이 정치적으로 백제와 무관하였기 때문이다. 신촌리의 금동관과 금동상투관이 백제 양식이 아닌 이유도 거기에 있다. 금동신발은 백제에서 제작된 것인데 그 주인공이 사망하자 백제에서 보낸 장송례품일 것이다.

나주 신촌리 금동신발을 백제에서 보낸 것은 당시 이 지역 마한 사회에서는 그와같은 부장용품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당시 이 지역에 도교가 파급되지 않았음을 말해줄 것이다. 불교가 백제보다 늦은 시기에 전해진 것과 상통하는 일이다.

1996년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 조사된 석실에서는 4인의 피장자 가운데 입구쪽에 안치되었던 인물에게서 백제 금동신발이 출토되었다. 금동상투관이 공반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주인공은 상투관이 필요 없는 여성이었을 것이다. 이 금동신발 역시 백제에서 장송례품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되므로 그 주인공은 백제와 관련된 여성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2006년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에서는 금동신발이 금동상투관과 함께 출토되었다. 모두 백제에서 제작된 것이므로 흔히들 그 주인공을 백제의 지방 신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고분의 구조·규모·공반유물과 당시의 국제정세를 종합하면 그렇게 보기 어렵다.

특히 금동상투관의 위치가 머리쪽이 아니라 발쪽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금동상투관은 생전에 백제에서 보낸 선물이지만 정작 그 주인공은 백제와의 관계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이고, 금동신발은 사후 장송례품으로 보낸 것이다. 백제는 남해상의 중요 기항지를 장악하고 있는 고흥지역 마한 세력과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금동신발 주인공의 복원 모습 <2013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발굴>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주인은 마한의 여성 지배자일까

나주 정촌고분 석실에는 3인이 안치되었는데 가장 늦게 추가된 인물은 백제 금동신발을 신고 있다. 출토된 뼈를 분석하여 40대 여성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생전의 얼굴 모습이 복원되었으며 남아있는 파리 유충을 통해 최소 6일 이상의 빈장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이 여성이 금동신발을 신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한 인물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여성은 안치된 위치가 석실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그 인물의 배우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여성이 백제 금동신발을 가진 것은 백제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근 복암리 3호분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광주·전남지역 마한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들은 백제가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제공하였던 장송례품이었다. 특히 나주 복암리 세력과는 혼인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는 6세기 후엽에 해당하는 백제 은화관식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나솔 이상 고위관리의 관모에 장착했던 것이다. 백제 병합 이후 현지 마한계 인물이 백제의 고위관리가 되었음을 말해 준다.

백제는 530년경 광주·전남지역을 병합한 다음 당시 중심을 이루었던 나주 반남세력을 배제하고 나주 다시세력을 통해 이 지역을 관리하였다. 병합지의 안전한 관리를 위해 기존 세력을 대신하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병합 이전부터 혼인정책을 통해 새로운 세력과 유대를 쌓았던 것이다. 이는 무력에 의한 일방적 병합과 이에 따른 무력 통치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마한연구원장·前전남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