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마한 장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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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한 장고분
마한지역 장고분의 주인공은 일본 규슈지역에서 온 망명객
2020년 08월 05일(수) 00:00
광주 광산구 월계동 장고분 복원후 전경. 원래 도로가 교차될 곳이었지만 도로를 우회시키고 유적공원을 만들었다.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지난 글 <14>에서는 마한의 석실묘는 석실이 지상에 위치하여 가족묘로 이용되었음을 살펴 보았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장고분은 지상 석실을 가진 점에서 마한 석실묘와 통하지만 분구 형태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차이가 없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고대 야마토 왕권의 상징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마한지역 장고분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장고분 분포도
◇ 장고분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관심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고분이 한국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는 오래 전에 제기된 바 있다. 1938년 나주 신촌리 6호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방불케 한다는 일본 학자의 견해가 그것인데 당시의 일선동조론과 무관하지 않다.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은 1983년이다. 한국에도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동일한 고분들이 있고 이 고분들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되었다는 견해였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긍정론과 부정론이 교차하면서 논란이 많았지만 거론된 고분 가운데 상당수가 고분이 아니거나 후대에 변형된 것으로 밝혀지는 한편 나머지 고분들은 일본 전방후원분의 성행시기에 해당하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장고분의 분포와 축조시기

장고분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마지막 마한 지역에서 5세기 말부터 6세기 중엽에 걸쳐 축조되었다. 고창, 영광, 함평, 광주, 담양, 영암, 해남 등지에서 15기 가량 확인되었는데 당시 중심지역인 나주에는 존재하지 않는 점과 현지 세력이 확인되지 않은 변방에 단독분 위주로 분포하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3세기 중엽에 시작되어 7세기 중엽까지 축조되었으며 현재 6000여기가 확인되어 있다. 작은 것은 길이가 30m 정도이지만 가장 큰 것은 486m에 달한다.

장고분은 5세기말부터 6세기 중엽 사이에 축조되었고 길이가 30m에서 70m 정도이므로 일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의 위세도 크게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함평 신덕 장고분 출토 왜계 금동관 복원도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장고분의 구조와 출토유물

장고분은 지상 분구에 석실이 위치하는데 그 구조는 일본 규슈지역의 북규슈식(北九州式)이나 히고식(肥後式) 석실과 상통한다. 북규슈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해당하고, 히고식은 6세기 초에서 6세기 중엽에 해당한다.

장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토기는 마한계와 왜계가 모두 보인다. 철기는 무기와 마구가 많은데 지역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제작지를 특정하기 어렵다. 금동관, 금동상투관, 금동신발 등의 위세품에는 왜계 뿐만 아니라 백제계도 있다.



◇장고분의 주인공에 대한 여러 견해

마한지역 장고분에 대한 관심은 매우 뜨겁다. 한국과 일본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견해는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토착세력자설은 현지 마한 세력자들이 남하하는 백제의 압박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야마토 무덤을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마토 무덤을 도입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토착세력이 그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이다.

둘째, 일본 파견 왜인설은 마지막 마한과 야마토 사이에 교역을 비롯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왜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야마토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던 백제나 가야에서는 왜 그와같은 고분을 찾아볼 수 없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이다.

세째, 백제 파견 왜인설은 백제가 마지막 마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왜계 백제관료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인정되는 백제 중심지에서는 장고분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넷째, 망명 왜인설은 3세기 말부터 한인들이 이주하여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왜인으로 정착하였지만 5세기말부터 6세기초 사이에 규슈지역 왜인들이 야마토에 쫓겨 망명하였다는 것이다.



광주 월계동 1호 장고분 발굴조사 광경. 1994년 전남대박물관. 석실이 분구 중간에 있고 주구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 장고분의 주인공과 축조배경

위의 4가지 견해를 보면, 똑같은 고고학 자료들이 왜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각자 견지해 왔던 시각의 연장선에서 이 문제를 풀고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고고학 자료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4가지 견해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자료가 보완되지 않더라도 가장 수긍하기 쉬운 견해는 망명 왜인설이다.

망명 왜인설의 문제점은 백제, 신라, 가야 지역에서는 장고분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인데 망명이라는 것은 요청받은 세력의 승인이 있어야 성립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쉽게 풀리게 된다.

망명을 요청 받은 입장에서는 야마토 왕권과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쫓겨오는 망명객을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영산강유역의 마지막 마한 세력은 백제·신라·가야와 달리 야마토 왕권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야마토에 쫓긴 규슈지역 세력자들의 망명을 받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당시 이 지역을 주도하였던 나주 세력은 다수의 망명객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외곽지대에 분산시켰다. 그와같은 대처에는 백제의 남하를 저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일부 장고분에서 출토되는 백제계 위세품은 백제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보낸 선물이었다.

국제적으로 전방후원분은 일본 야마토 정권의 지배 체제를 상징하는 고고학 자료로 알려져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전방후원분이 분포된 지역은 국가 간의 경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규슈에서 연쇄적으로 확장하였던 지역’이라는 견해가 나왔는데 이는 광주·전남의 마한 사회가 야마토 정권과 직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종래 가야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던 소위 임나일본부설에서 대상 공간만 마한지역으로 바뀐 셈이니 신임나일본부설이라 칭해질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해석이다.

우리마저 전방후원분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국제적으로 광주·전남의 역사적 정체성에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현지에서 통용되어 왔던 장구촌, 장고산, 장고봉 등의 명칭을 감안하면 장고분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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