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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바다를 건너온 마한의 신문물
마한의 신문물은 바다를 통해 들어와 강을 따라 확산됐다
2020년 10월 21일(수) 00:00
해남 용두리 고분 출토 중국 시유도기 파편(분묘제사용 술항아리, 2003년 국립광주박물관 발굴)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마한은 경기·충청·전라지역에 위치하면서 황해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하였다. 어쩌면 마한은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리적,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 황해 연안지역에서 발전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동이족의 분포 지역과 고조선의 세력 범위 (2006년 고등학교 교과서)
마한은 성립에 있어 기원전 3세기초 발해만 일대 고조선인의 바다를 통한 디아스포라가 중요한 배경이 되었고, 고조선이 서북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을 때에도 위만에게 쫓긴 준왕이 바다를 통해 마한지역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마한의 발전 과정에서는 수 많은 신문물들이 바다를 통해 들어와서 강을 따라 확산되었으며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도 파급되었다.



광주 복룡동 토광묘 출토 신나라 화천 꾸러미(2016년 동북아지석묘연구소 발굴)
◇바다를 건너 온 신문물

바다를 건너 마한으로 들어왔던 신문물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이동 가능한 물품은 물론이고 새로운 기술과 사조도 들어왔으며 새로운 묘제도 도입되었다.

물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도자기와 구슬이다. 도자기는 중국에 갔던 사신단에게 제공되었던 선물을 비롯하여 사신단을 구성하였던 여러 마한 소국의 대표들이 개별적, 선택적으로 구입하거나 마한 소국들에서 중국 상인을 통해 구입한 것이다.

구슬은 마한인들이 옷을 장식하는데 흔히 사용하였다는 내용이 여러 문헌에 기록될 정도로 특별한 물품이다. 그 가운데에는 금박유리구슬과 같이 동남아시아에서 제작되었던 것도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수입 과정이나 배경은 밝혀지지 않았다.

새로운 기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토목기술이다. 백제 한성기 도성이었던 서울 풍납토성에서는 성벽 토축 과정에서 나뭇잎이나 나무껍질을 10여 차례 반복하여 깔았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지반이 약한 지점에 제방이나 성벽을 축조할 때 사용되었던 방법이며 현대 토목기술로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를 ‘산초법(散草法)’이라 부르는데 기원전 6세기 초나라 때 축조되었던 안휘성 작피(芍陂) 저수지가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국내에서는 서울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당진 합덕제, 부여 나성, 김제 벽골제 등지의 고대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으며 ‘부엽공법(敷葉工法)’이라 부르고 있다. 이 용어는 우리보다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던 일본에서 먼저 확인되어 이름 지어진 것을 받아들인 것인데 우리의 고유 용어를 알 수 없다면 기원지의 명칭을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유교의 중요한 덕목인 조상 숭배와 제사는 일찌기 마한에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한의 무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분묘제사는 조상 숭배 사상이 기반이 된 것이며 혈연이 중심이된 가족 단위 분구묘 역시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부안 죽막동 유적 해양제사 추정도 (1995년 국립전주박물관 ‘바다와 제사’ 특별전 도록)
◇상인의 활동

중국 ‘삼국지’에는 서북한 지역에서 마한과 변한을 거쳐 왜로 이어지는 항해로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안을 따라 가는 항해로이며 변한의 철이 중요한 운송 품목이었다.

상인의 활동은 중국 동전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부분 연안항로를 따라 분포되어 있으며 영산강을 따라 나주 복암리와 광주 복룡동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전국시대 연나라 명도전를 비롯하여 한나라 오수전이 많이 보이고 신나라 화천도 출토된다.

중국 상인들의 무역 활동은 문헌 기록에 보인다. ‘한서’에는 후한의 상인들이 낙랑지역에 들어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삼국지’에는 낙랑에서 변한의 철을 수입해 갔다는 기록도 있다.

전북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는 3~6세기를 중심으로 마한, 백제, 가야, 중국, 왜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에 사용하였던 물품들이 발굴된 바 있다. 사신단도 있겠지만 대부분 상인 활동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서울 석촌동 마한계 고분 출토 중국 자기(1986년 서울대박물관 발굴)
◇사신단의 활동

중국 ‘진서’ 마한조를 보면 276~291년 사이에 마한과 서진의 교류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모두 9번에 걸쳐 사신단이 파견되었는데 적게는 3국(277년), 많게는 11국(289년) 등 여러 소국들이 동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서’ 장화전에는 위와는 별도로 282년에 신미제국 등 20여국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마한 소국에 변한 소국들이 포함된 것이다.

그 이후 한동안 교류 기록이 보이지 않은데 이는 291년 서진의 ‘8왕의 난’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진 내부의 혼란이 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동지역 선비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서진과의 교섭이 소강상태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황해를 사이에 둔 마한과 중국의 교류는 점차 백제와 중국의 교류로 바뀌어 나갔다. 백제는 근초고왕 27년(372) 처음으로 남조의 동진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는 건국 이후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였다.

백제의 건국 과정에 마한 세력들이 동참하였으므로 한동안 옛 마한 세력들이 기존 교류의 연장선에서 중국과의 교류를 계속해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백제 도읍이었던 서울 강남지역 마한계 무덤에서 출토된 동진의 청자와 목제 노는 그 주인공이 배를 소유하고 중국과 교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울 석촌동 마한계 고분 출토 목제 노 보존처리 광경(1986년 서울대박물관 발굴)
◇이주민의 활동

마한의 신문물은 이주민에 의해 전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후한) 환령지말에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이 이를 제압하지 못하자 백성들이 많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는 ‘삼국지’ 기록은 이주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다.

주민의 이주를 판별하는 고고학 자료는 다양하지만 묘제는 매우 확실한 자료이다. 오랜 세월동안 황해 연안에 위치하였던 마한 사회에서는 특별한 묘제가 성행하였다. 죽은 사람를 지하 토광에 묻지 않고 지상 분구에 담는 분구묘가 그것이다.

분구묘의 기원에 대해서는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중국에서도 산동반도 남쪽에서 절강성 북쪽에 이르는 황해 연안지역에서 먼저 성행하였던 묘제라는 점에서 상호 관련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한의 신문물은 발해만 지역에서 절강성에 이르는 황해 연안지역과 관련된 것들이 많지만 이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하는 것 같다.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도 한국의 영향을 애써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100여년 전에 출범하였을 뿐이므로 2500년 전의 공자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노나라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마한은 중국이라기 보다는 흔히 동이로 표현되는 황해 연안지역 나라들과 바다를 통해 교류하였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백제의 국제성과 개방성은 이와 같은 마한의 해양교류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백제 문화가 일본으로 파급된 것이 널리 인정되듯이 고대의 중국 문화가 한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밝혀나가야 할 것이다.

/마한연구원장·前 전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