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마한문화권 설정의 당위성
마한문화권 설정은 역사적 정체성과 지역발전의 토대
마한 문화권 설정은 ‘필요’ 아닌 ‘당위’
백제·신라·가야문화권과 나란히 해야
마한 문화권 설정은 ‘필요’ 아닌 ‘당위’
백제·신라·가야문화권과 나란히 해야
![]() 임나4현의 위치 <일본사 지도, 吉川弘文館, 2010, 東京> |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7> 마한문화권 설정의 당위성
지금까지 6편의 글을 통해 마한 사회의 출범에서부터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기원전 3세기초 요녕지역 고조선 주민의 이주에 따라 아산만 지역에서 출범하였던 마한 사회는 54개 소국을 이루고 발전하다가 3세기말부터 백제에 통합되기 시작하여 530년경 광주·전남지역을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음을 보았다.
특히 마한의 소멸 시기는 기존 인식과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교과서에 소개된 기존 통설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한 369년설이고, 고고자료를 토대로 한 신설은 530년설이다. 신설은 중국 ‘양직공도’의 기사를 통해서도 뒷받침되면서 기존 통설과 160년의 시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와같은 차이는 우리 고대사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기 때문에 신설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기우일 뿐이다. 일본 연구자 가운데에는 야마토 대왕의 직할령이었다는 임나4현이 전남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이도 있는데 이는 임나일본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막연한 희망일 뿐이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당시 마한이나 백제가 아닌 제3의 세력이 전남지역에 있었다거나 왜가 전남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가 광개토왕의 남침에 밀려 일본열도로 이주해 갔다는 견해가 한국에서 나오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는 타당한 명칭인가?
우리의 고대사회는 삼국시대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는 1145년에 간행되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인하는 바 크다. ‘삼국사기’는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로 구성되었으며 그 순서대로 출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글에서 삼국의 성립 순서를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우리 고대사회를 가야와 마한을 배제한 채 ‘삼국시대’로 부르는 잘못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야는 기원전 1세기경 변한에서 출발하여 김해 금관가야가 532년, 고령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통합되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삼국시대는 대가야가 소멸한 562년에 시작되어 백제가 망한 660년에 끝난다. 대가야가 통합되었던 때는 사국시대였고 마한이 통합되었던 때는 오국시대, 중국 양직공도에 나오는 521년의 백제 방소국들을 포함하면 다국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가야나 마한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등한 고대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논의가 필요하지만 고대국가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간단히 해결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마한이 530년경까지, 가야가 562년까지 삼국과는 별개의 정치체로서 독자적인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고대사회를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대가야 영역은 호남 동부지역까지인가?
가야는 6가야로 구분되어 김해 금관가야는 전기가야연맹을, 고령 대가야는 후기가야연맹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또한 역사적 사실과 다르지만 여기서 설명할 문제는 아니고, 고령 대가야 영역이 호남 동부지역까지 걸쳐 있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가야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 사이에 공주로 천도한 백제의 혼란을 틈타 금강 상류지역과 섬진강 상류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문헌기록은 소략하지만 고고자료를 통해 그 시기와 관련 지역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반세기 미만의 짧은 기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호남 동부지역을 대가야 영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로 인해 진안, 장수, 남원, 곡성, 구례, 여수, 순천, 광양 등 호남 동부지역 지자체 뿐만 아니라 서부지역에 해당하는 완주군까지도 가야문화권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가야문화권 개발사업의 혜택에 기대하는 바 없지 않을 것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한문화권 설정의 당위성
최근 고대문화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 많은 특별법들이 발의되고 있다. 역사 규명과 지역 발전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풍납토성 보존 및 주민 지원에 관한 특별법’(2017년 박인숙 의원 발의) 처럼 하나의 유적에만 적용된 것도 있다. 마한문화권이 담긴 것으로는 ‘고대역사문화권 연구·조사 및 발전에 관한 특별법’(2017년 윤영일 의원 발의)과 ‘마한역사문화권 연구·조사 및 정비에 관한 특별법’(2019년 서삼석 의원 발의)이 있다.
우리의 고대문화권은 백제문화권, 신라문화권, 가야문화권으로 대별되어 국토개발계획에 반영되어 왔다. 전남지역은 영산강고대문화권 혹은 다도해문화권 등으로 반영되어 왔을 뿐 역사적 주체가 명시되지 못하였다. 통설에 따라 백제권으로 보면서도 백제문화권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백제문화권과 구별된다고 해서 영산강고대문화권이라 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한강고대문화권, 금강고대문화권, 낙동강고대문화권이라는 것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자명해 진다. 역사적 주체가 명시되지 않은 고대문화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 발의되었던 특별법 가운데에는 고구려문화권이 설정된 것도 있다.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안’(2019년 민병철 의원 대표 발의)에는 백제역사문화권, 신라역사문화권, 가야역사문화권과 함께 고구려역사문화권이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실효적 지배가 미치는 지역에 한정한다’는 단서가 있으므로 불가능한 설정은 아니겠지만 전남 서부지역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으로 남겨져 있으면서도 ‘마한역사문화권’을 설정하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없다.
2006년 나주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경주(신라문화권), 부여(백제문화권), 창원(가야문화권)에 이어 4번째로 설치되었고, 2013년에는 국립나주박물관이 개관하였다. 백제문화권과 구분되는 전남지역에 대한 조사·연구와 전시·교육의 필요성이 국가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전남지역에는 674개 마한 유적이 확인되어 있지만 국가지정 문화재는 4개에 불과하다. 비슷한 수에 해당하는 가야 유적 가운데 국가지정 문화재는 42개이니 그 차이가 매우 크다. 지정문화재가 되기 위해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성격이 밝혀져야 하므로 앞으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발굴조사와 성격 규명이 요구된다.
전남지역 마한이 530년경까지 존속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고고자료를 통해 밝혀져 나가고 있는 만큼 전남지역 마한문화권 설정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조속히 마한문화권을 설정하여 조사, 연구, 개발이 다른 문화권과 동등한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7> 마한문화권 설정의 당위성
지금까지 6편의 글을 통해 마한 사회의 출범에서부터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기원전 3세기초 요녕지역 고조선 주민의 이주에 따라 아산만 지역에서 출범하였던 마한 사회는 54개 소국을 이루고 발전하다가 3세기말부터 백제에 통합되기 시작하여 530년경 광주·전남지역을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음을 보았다.
이와같은 차이는 우리 고대사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기 때문에 신설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기우일 뿐이다. 일본 연구자 가운데에는 야마토 대왕의 직할령이었다는 임나4현이 전남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이도 있는데 이는 임나일본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막연한 희망일 뿐이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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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대사회는 삼국시대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는 1145년에 간행되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인하는 바 크다. ‘삼국사기’는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로 구성되었으며 그 순서대로 출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글에서 삼국의 성립 순서를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우리 고대사회를 가야와 마한을 배제한 채 ‘삼국시대’로 부르는 잘못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야는 기원전 1세기경 변한에서 출발하여 김해 금관가야가 532년, 고령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통합되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삼국시대는 대가야가 소멸한 562년에 시작되어 백제가 망한 660년에 끝난다. 대가야가 통합되었던 때는 사국시대였고 마한이 통합되었던 때는 오국시대, 중국 양직공도에 나오는 521년의 백제 방소국들을 포함하면 다국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가야나 마한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등한 고대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논의가 필요하지만 고대국가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간단히 해결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마한이 530년경까지, 가야가 562년까지 삼국과는 별개의 정치체로서 독자적인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고대사회를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 대가야 강역도 |
가야는 6가야로 구분되어 김해 금관가야는 전기가야연맹을, 고령 대가야는 후기가야연맹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또한 역사적 사실과 다르지만 여기서 설명할 문제는 아니고, 고령 대가야 영역이 호남 동부지역까지 걸쳐 있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가야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 사이에 공주로 천도한 백제의 혼란을 틈타 금강 상류지역과 섬진강 상류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문헌기록은 소략하지만 고고자료를 통해 그 시기와 관련 지역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반세기 미만의 짧은 기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호남 동부지역을 대가야 영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로 인해 진안, 장수, 남원, 곡성, 구례, 여수, 순천, 광양 등 호남 동부지역 지자체 뿐만 아니라 서부지역에 해당하는 완주군까지도 가야문화권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가야문화권 개발사업의 혜택에 기대하는 바 없지 않을 것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
최근 고대문화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 많은 특별법들이 발의되고 있다. 역사 규명과 지역 발전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풍납토성 보존 및 주민 지원에 관한 특별법’(2017년 박인숙 의원 발의) 처럼 하나의 유적에만 적용된 것도 있다. 마한문화권이 담긴 것으로는 ‘고대역사문화권 연구·조사 및 발전에 관한 특별법’(2017년 윤영일 의원 발의)과 ‘마한역사문화권 연구·조사 및 정비에 관한 특별법’(2019년 서삼석 의원 발의)이 있다.
우리의 고대문화권은 백제문화권, 신라문화권, 가야문화권으로 대별되어 국토개발계획에 반영되어 왔다. 전남지역은 영산강고대문화권 혹은 다도해문화권 등으로 반영되어 왔을 뿐 역사적 주체가 명시되지 못하였다. 통설에 따라 백제권으로 보면서도 백제문화권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백제문화권과 구별된다고 해서 영산강고대문화권이라 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한강고대문화권, 금강고대문화권, 낙동강고대문화권이라는 것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자명해 진다. 역사적 주체가 명시되지 않은 고대문화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 발의되었던 특별법 가운데에는 고구려문화권이 설정된 것도 있다.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안’(2019년 민병철 의원 대표 발의)에는 백제역사문화권, 신라역사문화권, 가야역사문화권과 함께 고구려역사문화권이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실효적 지배가 미치는 지역에 한정한다’는 단서가 있으므로 불가능한 설정은 아니겠지만 전남 서부지역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으로 남겨져 있으면서도 ‘마한역사문화권’을 설정하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없다.
2006년 나주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경주(신라문화권), 부여(백제문화권), 창원(가야문화권)에 이어 4번째로 설치되었고, 2013년에는 국립나주박물관이 개관하였다. 백제문화권과 구분되는 전남지역에 대한 조사·연구와 전시·교육의 필요성이 국가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전남지역에는 674개 마한 유적이 확인되어 있지만 국가지정 문화재는 4개에 불과하다. 비슷한 수에 해당하는 가야 유적 가운데 국가지정 문화재는 42개이니 그 차이가 매우 크다. 지정문화재가 되기 위해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성격이 밝혀져야 하므로 앞으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발굴조사와 성격 규명이 요구된다.
전남지역 마한이 530년경까지 존속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고고자료를 통해 밝혀져 나가고 있는 만큼 전남지역 마한문화권 설정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조속히 마한문화권을 설정하여 조사, 연구, 개발이 다른 문화권과 동등한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