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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 총알 날아들어 창문에 이불 붙여놓고 살았었제…”
(5) 도청 인근 거주민 ‘지워지지 않는 기억’
충장로 이철환씨.금동사거리 홍원표씨.호남동 이화영씨
동료들과 장갑차 오르고 가게 지하에 시민들 피신 시켜
집 앞 변전기 총에 맞아 정전 피해...부상자 치료.시신 수습 도와
전두환 등 5.18 주도 세력 살아 있을 때 진상 규명하고 책임 물어야
2020년 01월 28일(화) 00:00
1980년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일시적으로 철수한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당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광주시민들이 하나 둘 몰려들고 있다. 1980년 5월 22~26일에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1980년 5월 당시 시민군이 계엄군 공수부대의 장갑차를 탈취해 시가지를 돌고있다.
40돌을 맞은 5·18은 광주의 아픔이고, 통곡의 기억 그 자체이다.

5·18은 계엄군의 군화발에 짓밟힌 피해자와 유가족들만의 고통은 아니다. 1980년 오월 당시 대한민국과 광주에 살고 있던 모든 국민의 아픔과 사무침이다.

특히 당시 광주의 모든 시민들은 아픈 기억을 넘어, 그 기억들을 다잡아 각자의 가슴 속에 아직도 깊이 새기고 있다. 5·18이 발생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시민들은 떠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의 삶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그분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그 자리에 같이 있었지만 아직 나만 살아있다는 채무감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 목소리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1980년 5월 당시부터 현재까지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살아가는 광주시민들을 소개한다.

왼쪽부터 이철환 씨, 홍원표 씨, 이화영 씨.
◇충장로 4가 주민 이철환(69)씨.

“5·18 당시 금남로 시위에 참여한 것을 한시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광주시 충장로 4가에서 닭 칼국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철환씨는 이곳에서 지난 1968년부터 51년째 살고 있는 충장로 토박이다.

이씨는 29세이던 1980년 5월을 직접목격했다. 당시 사촌이 운영하던 남양회관(통닭집)에서 일을 도우고 있었던 그는 5월 당시 금남로 시위에 참여했다.

이씨는 “13일께부터 가두 퍼레이드가 열렸다”며 “그때 구역과 신역 사이에 군인들이 활동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억압이 너무 심해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일하던 여직원들과 시위에 참여했다”며 “그때 여직원들은 겁 없게도 총을 들고 장갑차<사진 네모 안> 위에 올랐다. 지금도 이 사진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1980년 5월 당시 남양회관은 가게 문을 열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대피소로 활용됐다. 시위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이 군인에게 쫓기면 남양회관을 찾았고, 이씨는 가게 셔터를 내려 시민들을 보호했다.

이씨는 “그 당시 남양회관 지하에는 5평 정도의 작은 벙커가 있었다”며 “이곳에 시민들이 많이 숨어 있었다. 이곳에 총과 탄약을 보관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시민들 사이에 끼어 있던 한 군인에 의해 지하벙커가 발각됐다”며 “이 군인이 지하벙커에 최루탄을 터트리는 바람에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직도 5·18에 대한 시민의 긍지가 5·18을 이용하거나 독점하려는 일부 세력들 때문에 조금은 퇴색되고 있는 것 같다”며 “이제는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이다”고 말했다.

◇금동사거리 대동약국 홍원표(72)씨

홍원표씨는 지난 1975년부터 금동사거리에서 대동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떠났지만 홍씨는 이곳에 남아있다.

홍씨에게 5·18은 이미 지난 아픔이지만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홍씨는 “지금도 생각하면 무섭다. 집안으로 총알이 날아 올까봐 무서워 창문에는 이불을 붙였다”며 “자식이 있고 약국 때문에 직접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어느 날은 시민군이 가게 앞에 있던 변전기를 총으로 쏘는 바람에 금동 일대가 정전이 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홍씨가 운영하는 약국은 5·18 주요 격전지와 떨어져 있어 5·18 기간중에도 문을 열수 있었다.

홍씨는 “5월 당시 일부 시위 부상자들이 약국을 찾기도 했다”며 “정성껏 치료해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5·18 당시 상무관에 찾아가 시신들을 수습하기도 했다. 홍씨는 “5·18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그 진실이 잊혀지지 않게 기록으로 남겼던 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아야 한다”며 “5·18 40주년을 맞은 만큼 5·18의 숨은 공로자들을 기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남동 광주주단 이화영(79)씨

“직접적으로 활동하지 못해 5·18은 아직도 가장 아픈 기억입니다.”

지난 1976년부터 광주주단을 운영하고 있는 이화영씨에게 5·18은 씻을 수 없는 상처다.

당시 충장파출소 건너편에서 광주주단을 운영하던 이씨는 5·18이 발생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시위에 나가 앞장서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그는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두환을 비롯해 5·18을 주도한 실무진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5·18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이씨는 “5·18이 40년이나 지나면서 광주 시민들에게 5·18에 대해서 물어보면 정확히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5월 영령들이 목숨 걸고 광주를 지켜 민주화의 뿌리가 내릴 수 있었다. 5월 역사를 위한 정리와 함께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홍콩민주화 운동 중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것을 볼 때 5·18의 영향을 상당 부분 받은 것으로 보인다”며 “이제는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는 전세계 각국에 우리가 희망을 줄 차례다. 국제적 연대 등을 통해 우리가 가진 경험을 전수해 줘야 할 때이다”고 말했다.

/김한영 기자 you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