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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에는 정의가 없다
윤영기 사회부장
2018년 10월 03일(수) 00:00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여셨네요.” 최근 아는 사람이 전화를 통해 건네 온 걱정 섞인 말이다. 그는 아마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문화전당)이 5·18 단체들에게 110억 원대 구상권 청구를 검토하고 있다’는 광주일보 기사를 보았던 모양이다. 그의 말에는 난맥처럼 얽힌 이 문제를 푼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짙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5월 단체들은 지난 2008년부터 2년 이상 농성 투쟁을 통해 문화전당 건립 부지에 포함돼 철거될 예정이었던 옛 전남도청 별관을 존치시켰다. ‘5·18 시민군 최후 항쟁지’를 보존하고자 하는 5월 유족과 5·18단체 등이 사투 끝에 이룬 성과였다. 구상권의 불씨는 공사를 맡은 업체들이 지폈다. 대림산업 등은 2년 동안 공사 지연으로 손해를 봤다며 정부(문화전당)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110억 원을 받아 냈다. 막대한 국고 손실이 발생한 만큼 문화전당 측은 책임 소재를 가려야 했다. 결국, 법리 검토를 거쳐 구상권(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단을 받았다.

문화전당이 2016년 1월에 금액을 업체에 물어 주었으니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기한(3년)은 2019년 1월까지였다. 하지만 3년짜리 시한폭탄은 금기였다. 피폭 범위가 뚜렷한 폭발성 때문이다. 옛일로 구상권을 행사하면 5월 단체 또는 지역사회와 또다시 척을 지게 되는 것이 그 첫째였다. 설상가상으로 5월 단체 등은 지난 2016년 9월부터 옛 전남 도청 복원을 촉구하면서 2차 점거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상권을 철회하면 기관과 직원 등이 직무 유기 등으로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진퇴양난이었다. 문화전당은 그렇게 버티다 10월 현재 구상권 청구 소멸 시한을 불과 4개월 남겨 두는 처지에 몰렸다. 다행인 것은 문화전당이 5월 정신의 계승을 자처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 문제를 끌고 왔다는 점이다.



때늦은 손해 배상 청구서



문화전당이 쥐고 있던 ‘시한폭탄’은 정부에 넘겨졌지만 명쾌한 해법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5월 단체와 면담에서 “여러 가지 고려해서 현명하게 결정하겠다”고 말을 아낀 데서 곤혹스러움이 묻어난다. 물론 정부는 구상권 철회의 명분을 만들고 야당과 보수 언론의 공세도 방어해야 한다. 정부는 지난해 국무회의에서 34억여 원에 달하는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소송을 철회했을 때 야당과 보수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내상을 입은 기억을 아직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야당으로부터 국무총리와 법무장관 등은 직무 유기 혐의로 고발까지 당한 바 있다. 그렇다고 정부가 법의 범주에서만 해법을 찾는다면 딱한 노릇이다. 구상권은 민사적으로는 금전적 피해 구제와 보상의 성격이 있다. 하지만 압도적 지위에 있는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의 원고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징벌적 성격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경찰이 쌍용차 해고자 100여 명과 노조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배상액 11억3000여 만 원을 받아 낸 판결이 대표적인 예다. 해고자들을 상대로 돈을 받아 내기 위해 가압류조치까지 취했다.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의 피해를 보상하라는 정부의 합법적 조치였음에도 여론은 싸늘하기만 했다.

광주는 어떨까. 110억 원대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은 5·18 유족 등에 대한 국가의 경제적 보복으로 인식될 것이다. 더구나 소송의 당사자는 도청 별관에서 절규했던 5월 유족과 단체 관련자들이다. 5·18 당시 옛 전남 도청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절명한 희생자들의 유족도 다수 포함돼 있다. 정부는 원치 않겠지만 국가 폭력의 희생자에게 경제적 폭력까지 행사하는 셈이 되고 만다. 액면 그대로 ‘법대로’의 한계다. 그러니 적어도 헌법에 5·18 정신을 새기려는 정부라면, 접근 방식에서부터 차원을 달리해야 한다. 5월 역사 현장 복원이라는 맥락에 실마리가 있다. 대통령은 지난해 5·18 기념식에서 옛 전남 도청을 광주시와 협의해 복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전남 도청과 구상권 청구의 발단이 된 전남 도청 별관은 부속 건물이다. 따지고 보면 5·18 최후 항쟁지를 단순 시설로 접근해 철거하려 했던 역사의 무지에서 사태가 비롯한 정부의 책임도 있으니 이제 옛 정부의 오류를 바로잡는 계기도 될 것이다.



대승적 차원 해법 찾아야



상식적으로도 해법은 없지 않다. 구상권 문제는 정부가 당시 광주시 및 5월 단체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별관 존치를 결정했을 때 향후 법적으로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불가역적 합의로 처리했어야 할 사안이었다. 정부가 사후적 정의를 실천하는 선에서 구상권 행사를 철회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무엇보다 정부가 구상권이라는 갈등 비용을 슬기롭게 해소하지 못하면 결국 국책 사업인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사업과 그 중심에 있는 문화전당 활성화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것이다. 문화전당은 설계 당시부터 랜드마크 논란을 비롯해 옛 전남 도청 별관 존치, 본관 복원 등 거듭된 논란으로 활성화가 지체돼 왔다. 정부가 구상권 문제로 또 다른 논란을 자초한다면 전당의 활성화는 물론 광주의 민심을 한꺼번에 잃게 될 것이니 ‘게도 구럭도 다 잃는’ 꼴이 될 것이다. /penfoot@